ȸ

{ 설봉 스님의 안면암 일기 } : 82.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바라이 죄(사랑을 것) 4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2건 조회 177회 작성일 25-01-10 08:41

본문



5ed9cf7e26fb859421fb524ba4b0ba40_1700725845_412.jpg



0720fa0f7f060784acaed3814a7c68d2_1700520412_5397.jpg

 


82.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바라이 죄(사정품 2) 4

 

   옛 선사들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는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스님에 따라서 한 번의 확철대오도 있고, 1차 깨달음이나 2차 깨달음이 있는가 하면 또 3차 깨달음까지도 있다. 옛 선사들의 행적을 읽을 때마다 이런 의문을 가져 본다. 왜 예전에는 스님들 이 깨달음을 얻기가 쉬웠는데 요즘에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스님들이 많지 않느냐는 것이다. 불경에 보면 부처님의 설법 장소에 모인 대중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자리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열반하신 큰스님들의 행적에서도 '한 소식'이라든지 어떤 '견처(見處)'가 있었다는 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스님네들은 20~30대에 벌써 상당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50~60대 이후의 스님네들은 왜 깨달음을

얻었다고 공식으로 발표하는 일이 없느냐는 물음이다.

 

   어떤 스님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옛날에는 정보의 양이 적었기 때문에 웬만한 깨달음만 얻어도 그것을 일 관되게 실천하고 또 그 깨달음의 정신을 연장해서 밀고 나가면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서 아주 큰 깨달음을 얻지 않으면 소소한 깨달음을 가지고는 복잡한 현대사회를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에 의해서 상당한 경지에 이론 스님네들도 가볍게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현대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수행자가 많지 않은 이유를 현대의 산만한 수행 풍토에서 찾는 분도 있다. 예전에는 수행자들이 마음을 집중해서 공부하기가 좋았는데, 현대 산업사회에는 산에 호랑이가 없어질 정도로 모든 산들이 시끄러워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등 산을 많이 하기 때문에 산이 시끄러워졌다는 것이 아니라 산속에도 현대의 물질문명이 침투해서 일체의 물욕을 버리게 하는 깨달음을 얻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 죄송합니다만, 내일 또 이어 게시봉사하겠습니다.




19ebbe5ae143cdac87bbff2a95672324_1736466257_944.jpg

19ebbe5ae143cdac87bbff2a95672324_1736466258_2274.jpg

19ebbe5ae143cdac87bbff2a95672324_1736466258_6708.jpg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

“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살아있는 것에 대해 한량 없는 자비심을 내라 ”

                                                                                <법구경>

[ 선시(禪詩) ]

*** 석지현 스님의 선시집에서 ( 현암사)

<그대를 보내고>
- 초의 의순

그대 보내고 고개 돌리니 날은 저무는데 마음은 안개비에 아득히 젖네 오늘 아침 안개비 따라 봄마저 가고 쓸쓸히 낙화를 마주하고 잠드네.

用前韻奉呈水使沈公 용전운봉정수사실공


離來回首夕陽天 思入濛濛煙雨邊 煙雨今朝春併去 悄然空對落花眠
이래회수석양천 사입용몽연우변 연우금조춘병거 초연공대락화면
=출전초의집

### 주
ㆍ회수(回首): 고개를 돌리다.
·몽몽(濛濛): 비, 구름, 안개 같은 것으로 인해 날씨가 침침한 모양, 여 기서는 주관적인 작가의 심정을 석양과 대조시켜 객관화한 것이다.

·병(併): 더불어.
·초연(悄然): 고적하고 맥이 없는 모양.

• 해설

이별의 시로서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작품이다. 전편의 흐름에 무리가 없고 꽃잎인 듯한 부드러움과 가랑비인 듯한 슬픔이 온다. 특히 2구 ‘사입몽몽연우변(思入濛濛煙雨邊)’의 ‘입’은 기가 차다. 이별하는 그 생각이 가랑비 아득한 저 끝에 스미어 들어간다는 뜻이다. 연우(煙雨)와 몽몽(濛濛) 변(邊)과 입(入)의 어울림은 이별의 정을 나타낸 극치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초의는 시승(詩僧)이요, 선승이요, 다승(茶僧)이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친구였더란 말인가.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윤병예 합장

석원영님의 댓글

석원영 작성일

눈을 떠도 아니 보이고
  눈을 감아도 아니 보이는  것
  그대  등  뒤에 걸린  커다란  하늘은
  실눈을 뜨고서야  비로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