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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주: 변시지 화백의 그림을 알아보지 못한 통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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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게시대행 댓글 11건 조회 41,228회 작성일 20-07-12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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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悔恨)을 남겼던 무지(無知) 


얼마 전까지만해도 "알아야 면장(面長)을 해 먹지"라는 옛날식 우스갯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말은 자기의 무지를 한탄하는 자조(自嘲) 썪인 말로도 사용되었고

진실로 아는 것이 없으면 아무일도 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모두 유명해지는 것도 아니다.

나 스스로는 내가 아는 것들이 섣부른 겉핡기 지식이 아닐까 두려워지는 때가 훨씬 더 많다.



본 안면암 홈피에 게시대행으로 수고 하시는 해탈심 보살님이

석지명 큰스님께서 집필하신 저서 " 한 권으로 읽는 불교 교리" 에 나오는

<혹업고(惑業苦)- 미혹의 윤회 세계를 설명하는 기본틀>에 관련하여

두 번씩이나 안면암 홈피에 글을 올리셨지만 .

석지명 큰스님의 법문에 대하여 나는 내가 이 글을 얼마나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

도무지 자신감이 생겨나지 않아서 댓글 쓰기조차 망설여지고,

이해하려 노력할수록 힘들어서 나의 무지가 얼마나 짙은지를 더욱 선명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젊은 날에 나는 내가 무지한 줄도 모른 채 무지하게 살아서

큰 회한(悔恨)을 남겼던 사실이 지금에도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 등에 솜씨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등교 첫 날에 담임선생님이 큰 하얀 종이 한 장과 빨강 초록 흙색 종이를 각 한 장씩 주고

마음 가는대로 뭘 만들어보라 했다. 나는 빨강으로 튤립 꽃을, 초록으로 튤립 이파리를 손으로 조심스레 찢어가며 오려붙이고 맨 아래 흙색 종이로 화분을 오려 꽃을 받쳐서 제출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가보니 교실 뒤켠 <참 잘했어요> 판에



내 작품? 하나만 붙어 있었다. 2학년 때 <불조심> 포스터를 그려 냈는데 얼마 후 그 내 그림이 인쇄되어 학교 주변 마을 일대에 벽보처럼 붙어 있었다. 4학년 봄에 작난감 고양이를 수묵화(水墨畵)로 그렸는데, 아버지 손잡고 한국으로 귀국 차 교장실에 인사 갔더니 내 고양이 그림이 액자에 넣어져서 교장실 장식용으로 벽에 붙여져 있었다. 경북여고 2학년 때, UNESCO가 주관한 전 세계 고교생 그림 경연이 있었다. 나는 공작새 한 쌍을 그려 냈는데, 그 그림이 입상하고, 파리에서 전시되었다.



법과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그림 그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결혼 후, 일제 시대 선전(鮮展)에 서양화를 그려서 입상한

경력이 있는 남편의 서재에서 <서양화 전집> 책을 꺼내서 자주 감상하였었다.

Vincent Van Gogh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별이 빛나는 밤에>를 즐겨 보곤 했었다. 교회 첨탑 아래 나즈막히 잠든

작은 마을, 그 위에 소용돌이 치는 구름들 사이에 빛나는 작은 별들, 화면 오른쪽 윗켠에 자리한 달 같은 커다란 별. 뭔가

내 마음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그 환상적 분위기에 매료되어서 나는 이 그림을 지금도 매우 좋아한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 Marc Chagall 의 작품 대부분이 아주 밝은 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



결혼과 더불어 전업주부로 살다가 1970년대 초에 나는 다시 사회에 나가 NGO 활동을 시작하였다. 나는 직장을 그만 두었었고, 대학 교수인 남편은 부잣집 출신이라서 그 작은 월급에 씀씀이는 지나쳐서 나는 살림살이에 남모르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내가 관여하는 NGO사무실에 낯선 여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길게 이어진 그 이사회가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조용히 기다리더니 폐회 후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잠깐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했다. 뭔가를 호소할 사건이 있나 싶어

모두들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녀는 젊고 가늘고 파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불 위에 보자기를 풀고 표구가 되지 않은 30여점이 넘게 보이는 그림들을 꺼내서 한 장씩 보여주면서, "내 남편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이지만 그림은 알아줄만하다"면서 화가 격려 차원에서 하나씩 사 달라고 했다.



회의용 테이블 끝자락에 앉아서 나는 물끄러미 그가 들어 보이는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우편엽서 4개를 붙인 사이즈로 4호라 했다. 그 보다 작은 것이 절반 정도는 되어보였다.

그런데, 밝은 색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는 전혀 와 닿지 않았다. 화폭 전체가 누리끼리한 황토색인데

하늘과 바다까지 누렇게 칠하고 있는 그림에 거부감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내 마음 한 켠에 어떤 애잔한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림들은 모두 그 화가의 고향이라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바람과 바다와 말이 그려지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휘어져 나부끼는 나무가 있고, 그 아래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납짝 업드려 있고, 표정을 알 수 없는

고뇌에 찬 듯한 사내가 쭈그리고 앉아 있고, 모든 그림에 말 한 마리가 반드시 등장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말이 앞을 보며 내닫는 때도 있으나 자주 그 남자를 돌아보며 기다려 주고 소통하는 듯한 모습이 많아보였다.



나는 어떤 동정심이 일어 그 그림 하나 사줄까 생각했었으나 남편의 월급 하나로 시어머님을 비롯한 대가족을 건사해야하는 나에게는 선뜻 떼어 낼 돈이 없었다. 마음이 언짢아서 그림만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그 여자는 남편의 그림을 한 점도 팔지 못하고 조용히 사무실 문을 열고 돌아갔다. 녀의 쓸쓸한 뒷모습이 나의 슬픔으로 맺혀서 오래도록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경제적 사정보다도 어쩌면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나의 무지가 젊은 여인을 격려해 주지 못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림의 예술성을 알아보지 못한 무지가 오래도록 가슴 아픈 회한을 남긴 것이다.



10여년이 흘러 나는 대학 교수가 되어 일정 수입이 보장되었고, 그 때 그 여자의 남편 화가는 변시지(邊時志)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2010년 경이었을까. 변시지 화백의 소식이 들려왔다. <미술관 가는 길>이란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 때 본 그림들을 회상했다. 그의 그림은 눈에 생생하게 떠올랐고, 황토색으로 칠해진 바다 멀리 수평선상에 보일듯 말듯 그려진 작은 돗단배가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듯한 느낌마져 일었다.

황토색으로 누리끼한 화면에 오로지 한 가지 다른 색으로 사용되는 것은 검은 색이었다. 제주 바람을 강조하려는 듯

휘어지는 나무 윤곽과 그림마다 등장하면서도 절대로 얼굴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남자의 모습과 쓰러질 것 같은 낮은

초가집과 달리는 말의 윤곽만을 검은 색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변시지 화백은 "왜 그림 속 사람이 늘 하나 뿐이냐"는 질문에

"그림 속에 사람이 둘이면 나와 대화할 상대가 없어지니까"라고 답했다 한다.

이 대화는 그의 그림 속에 어떤 철학적 사고가 깃들여 있다고 막연하게나마 깨닫게 하였다.



대학에서 은퇴한 후, 나는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크신 스승 석지명 스님의 권유로 불화(佛畵)를 그리게 되었다.

불화는 주로 오방색(五方色)을 사용한다. 충북 진천 영수사(靈水寺)에 보존 중인 보물 제1551호 <영산회괘불탱>을 그리면서 그 그림을 연구한 문화재 위원의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읽으며 그 괘불탱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림 보는 안목이 어느 정도 세련되었을 즈음에 이르러, 변시지 화백의 그림이 황토색 일변도라고 고개를 저었던 나의 무지를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변시지 화백이 하늘이나 바다까지도 황토색으로 그렸지만 그의 붓끝은 마술처럼 태양의 강렬한 빛을 조화롭게 켄버스 위에 창조하고, 황토색 바다에 물결이 출렁이며 춤추는 느낌을 주고 , 바닷가 혹은 언덕 넘어에 납짝하게 업드린 초가집에서 훈훈한 고향을 느끼게 하고, 일정 거리를 두고 그려지는 말과 사람 사이에 어떤 속삭임이 정겨운 소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내 마음에 번져나갔다. 이러한 나의 설익은 느낌이나 표현들이 변시지 화백의 예술성에 누(累)를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 그의 그림들을 회상하면서 자못 깊은 감상에 빠져들었다.



변시지 화백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미국의 수도 워싱톤 D.C.에 있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Smithsonian 박물관에 변시지 화백의 100호 짜리 그림 두 점,

"이대로 가는 길- Leaving along this Path like this"과 까마귀들의 "난무(亂舞)"가 10년 대여 계약으로

전시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내 마음에 남은 회한을 깨끗이 씻어주는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가늘고 파리하던 부인, 변시지 화백의 아내는 내조의 보람을 만끽하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알아보지 못한 것들이, 어찌 오직 변시지 화백이 이름 날리기 전의 그림뿐이랴....  지금도.


                                   2020. 07. 12. 오선주

댓글목록

ybr님의 댓글

ybr 작성일

존경하는 오선주 보살님!~

제목을 보자마자
내용이 궁금해 6시 이전부터
스마트폰으로 접속을 시작했으나
불가능했습니다.
하여 시간을 틈타 겨우 노트북으로 간신히
댓글을 올렸는데
이 또한 댓글 등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전국적인  장마 탓으로
온라인이 여의치 않은 것같으니
죄송하지만

나중에 다시 올리겠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안인숙님의 댓글

안인숙 작성일

그렇습니다. 귀한 보물 못 알아보고 지나는 경우가 많지요. 어쩌면 보물을 잡았다 해도 사람의 변덕은 쉽게 실증을 낼 수도 있겠네요. 늘 좋은 글 주시는 오선주님 감사합니다. 안인숙 합장

안인숙님의 댓글

안인숙 작성일

위에 댓글 쓰신 해탈심님 존경합니다.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생면부지의 안인숙님!~

안면암 홈페이지에서
생전 처음으로 들어 보는 존경한다는 말씀에
저의 무지를 돌아봄과  함께
고매하신 인격을 지니신
보살님의 존재에 대해 무척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모자라기만 한 저에게 이토록 과분한 칭찬을 베푸시다니
부끄러운 한편 감개무량입니다.

오래지 않아
반드시 뵙고 감사의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그날까지 부디부디 코로나19 역병과
여름 폭염에서 나아가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늘 건강하시길 비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항상 부지런하신 해탈심 보살님.
안면암 홈피 서버에 잠시 문제가 있었던 듯합니다.

나의 무지를 반성하는 글인데 관심을 갖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끝날 줄 모르는 코로나조심하세요.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안인숙 님!
좋은 말씀으로 저를 격려해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이 탓인지
사람과 이름을 일치하여 기억 못하고 실수 하는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부디 탓하지 마시고 다음에 만ㄴ날 기회에
내가 안인숙이라고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늙으면 기억력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쇠퇴하여 설럽습니다.
황혼의 비애라고나 할까요.

젊으신 날에 후회 없이 사시기 바랍니다.

ybr님의 댓글

ybr 작성일

존경하는 오선주 보살님!~

머리가 하얘져 버린 느낌이었는데
다행히 시간이 잠시 허락되었습니다.

보살님께서는 변시지 화백님의 그림을
알아보시 못하신 것이 절대로 아닌 것같습니다.
다만
그때 시절 인연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심미안이 깊으신 보살님께서는
오래 전 그림이지만
작가님의 작품세계를 눈에 보이듯이 예리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만약 이대로 가는 길을 직접 감상할 기회가 온다면
많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저는 큰스님 방에 높이 걸린 보살님의 불화를 볼 때마다
얼마나 세세생생에서 큰 공덕을 지으셨길래
현생에서 그리도 많은 재능과 복과 지혜를 누리고 계실까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온 중생이므로
통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환갑이 넘어
큰스님께서 대원력으로 창건하신 안면암과 안면암 홈페이지에서
많은 불자님들과 독자님들을 만나게 되는 고귀한  행운을 얻었습니다.

현실에서나 온라인 상에서
만나는 선재님들께서는
항상 크고 작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정중히 축원드리며
졸필을 내려 놓겠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부지런하신 해탈심 보살님!

무엇 하나 잘하는 것이 없는
이 두루뭉수리 같은  사람에게
많은 재능과 복과 지혜를 누린다 하시니 참으로 부끄럽고 할 말이 없어집니다.

무심히 흘러보낸 세월 속에 회한만 남았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오선주 합장

ybr님의 댓글

ybr 작성일

존경하는 오선주 보살님!~

너무나 겸손하십니다.
<잘 익은 곡식이 고개를 숙인다> 는 속담이 헛말이 아님을 잘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 아주 작은 영광도 회한도 없습니다.


보살님과 똑같은 생각입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 것이
저의 금생에서 가장 큰 복이고 행운입니다.

                                                  해탈심 합장

소양자님의 댓글

소양자 작성일

정말 안타깝네요. 그분의 작품이 유명해졌다니 다행입니다.저는 아주 유명한 그림을 모르고 버렸습니다. 허백련화백의 그림을요... 다 무상 무아입니다. .. 룻음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사랑하는    존경하는 보살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오래 오래  글 주십시요 어제보다  오늘  이좋아요.  또다른  희망이  있으니가요.  살아가는 묘법 속에  진흙 길이라해도    당신  불법승  속에 행복 한걸  알았읍니다,  이것이  인  생  이라나요.    빗속도 걷고  눈도 맞고  외로움도  그리음도  응무 소주  이생기심다이 아몬드로  살다가시길  두손 모읍니다.  그럼  저는  양치하고  올라가겠읍니다.  오늘도 변함 업시  배가 들숨날숨합니다.    나무  불법승    ....원만 행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