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 안면암 일기 } : < 092 무 4 > 2022년 1월 22일 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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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5건 조회 1,177회 작성일 22-01-22 07:20본문
[ 법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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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얻음에서 불평을 말라
남의 분(分)을 실없이 부러워 말라.
남을 함부로 부러워하는 비구,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한다.
인간에의 신뢰, 실로 이것은 우리 혼의 평안한 숙박소 위안처요, 불 신에의 신앙이 곧 그것이다.
여기에서 생활의 어둡고 거친 풍우의 밤은 평정한 아침으로,
나직이 누르는 음울한 하늘은 청량한 하늘로 전화(轉化) 개전(開展)되어 가는 것이다.

092 무無 4
선禪이나 불교 일반에서 무사상과 관련하여 가장 빈번하게 제기되는 질문은 "무분별無分別, 무일물無一物, 무집작, 무위無爲, 무애無碍에 철저하다 보면 결국 허무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냐"이다. 사실 이 질문이 초심자의 것만은 아니다. 선 수행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함정이기도 하다.
저 물음에 대한 답은 무사상은 넷째 특징인 "무무無無, 무위위無爲爲, 또는 무착생심無着生心이다. 고정적인 무는 끝까지 부정되어야 하고 인위를 피하면서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이 있어야 하고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부처님의 몸인 이 세계에 장엄하기 위해 참선을 하는가. 삶은 좋게 하기 위해서다. 참다운 "삶"이 무엇이냐와 "좋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뜻하는 것이냐을 규정하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의견의 격차가 크더라도, 어떤 형식이든지 살아 있다는 것과 좋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불교 일반에서도 상주론과 단멸론, 즉 어떤 주체가 변하지 않고 항상 존재한다든지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완전히 절멸된다는 양극을 부정한다. 선도 허무주의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무를 가르치는 선사들이 실제로 부처와 조사를 다 부수거나 , 제자들을 다 쫒아 버리고 절을 허물어 버리지는 않는다. 한 사람이라도 더 깨우쳐서 불조의 혜명을 이어 가도록 줄기차게 노력한다. 유명한 선사들은 대부분 많은 제자들을 두고 있다. 선사들이 무를 가르치지만 이를 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자체가 또 다른 집착이 된다. 구름은 흩어지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무이지만, 여기에 집착하면 구름이 흩어지는 도리만 알고 다시 모이는 도리는 모르게 된다. 모인 구름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에서 무이지만 그것에 빠진다면 다시 그 무도 부정되어야 한다. 산과 물에 부정과 긍정을 가하면 다시 산은 산, 물은 물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집착이 있으면 그 또한 부정되어야 한다. 무는 끝없는 부정을 뜻한다. 단지 부정하면서도 온 우주를 부처님의 몸으로 보고, 그 몸을 지혜와 자비로 장엄하는 노력은 권장된다. 무집착을 전제로 노력하는 무위의 행위와 자기중심의 집착이 없이 무대를 꾸미려고 하는 가다듬어진 의욕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무가 무위의 노력이라는 점에서 역사, 창조, 생산, 현실 등이 중요시 된다. 선을 활용해서 정치와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은 소매상이 아니다. 도매상이료 공장이다.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흘로 나오므로, 그 원천을 바로 잡으면, 잡다한 세상사도 좋아지게 된다. 한 선 수행자가 형식에 집착해서 수행을 하니까 스승은 그의 앞에서 기왓장을 간다. 수행자가 이유를 물으니 스승은 기왓장으로 거울을 만들 것이라고 대답한다. 수행자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할 때, 스승은 기왓장으로 거울을 만들 것이라고 대답한다. 수행자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할 때, 스승은 그대의 참선도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수행자가 바른 수행법을 물으니까 스승은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소와 수레 가운데 어느 것에 채찍질을 해야 할 것이지를 묻는다. 선이 무자를 쓰는 것은, 마치 수레가 아닌 소를 치듯이, 마음의 뿌리애 관심을 갖는 것이다.
현실의 우리는 돈, 권력, 명예로 세상에서 게임을 만들고 있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컴퓨터 안에서 게임을 만든다. 현실은 분명히 손에 잡히고, 컴퓨터의 게임은 화면 속에만 있다. 그러나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속에서는 두 게임이 크게 다를 바 없다. 현대의 도시 문명이라는 파일이 지워지는 데는 컴퓨터의 파일이 지워지는 것보다 엄청나게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지워질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컴퓨터 게임에 집착하지 않듯이 현실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게임을 만들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이것이 무사상에 있는 창조적 측면의 좋은 설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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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
"항상 복덕을 지어 보시를 행하라."
ㅡ 사아함모초해
< 석굴엄대불石屈庵大佛 > / 청마 유치환
목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
천 년을 차거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목숨이란! 목숨이란 ㅡ
억만년을 원願 두어도
다시는 못 갖는 것이매
이대로는 못 버릴 것이매
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 연蓮잎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 없이 지새는 흰 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寂寂히 눈감고 가부좌하였노니.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오늘글은 수행승의 멋진 깊이있는 , 컴퓨터의비유의 지움현실의집착없는 수행 . 상구보리 하화중생 의 실천에의 넓고 쉬운 비유의 견을 알려주심의 자비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허공에 버리면 즐거운 것을 오늘도 발고 여락 관세음보살 허공에버리는것이 큰보시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보살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중생들로부터 발고여락(拔苦與樂 ㅡ 자비로써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고 즐거움을 주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부처님법을 만났으니 축복받은 인생입니다.
허공에 버리는 것이 큰보시임을 새삼 감사히 배우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ㅇㄷ님의 댓글
ㅇㄷ 작성일
우리가 컴퓨터 게임에 집착하지 않듯이 현실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게임을 만들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면, 이것이 무사상에 있는 창조적 측면의 좋은 설명이 될 것이다.
무(無)로부터 창조를..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ㅇㄷ님!~
저는 이 나이
고종명考終命 (일생 동안 평안하게 살다가 천명天命을 마침) 70세가 되도록 컴퓨터 게임을 즐긴 적이 없습니다.
단 한번도 이 게임에 집착해 보지 않았으니
이 고종명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신 친정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아직 무명과 미혹의 중생인지라 무無에서의 창조는 너무나 멀고 어렵습니다.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