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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 {안면암 일기 } : < 059 우주에 충만한 불신 > 2021년 12월 20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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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1,625회 작성일 21-12-20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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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구경 >

332

집에 어머니 있어 즐거움이다.

아버지 있어 또한 즐거움이다.

세상에 사문 있어 즐거움이다.

천하에 도가 있어 즐거움이다.


하느님이 나를 창조하지 않았고, 하늘이 나를 내지 않았으며

나는 나의 탄생의 의의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

자기의 미망의 업보로 생겨났고, 생겨났어도 복과 혜(慧)를 타고나지 못했으며

도리어 자기 자신이 밉고 또한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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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9    우주에 충만한 불신


「  화엄경 」은 세존이 마갈타국에서 정각을 이루었다는 말로부터 시작된다. 이로 보아 경을 설하는 주체가 세존으로 짐작될 수 있다. 그러나 「 화엄경 」에서 세존은 직접 설명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다른 이에 의지해서 가르침이 전해진다. 세존은 모든 것, 몸은 온 세계에 꽉 차 있는 것으로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  화엄경 」의 설주設主를 역사적 부처님인 세존을 넘어서, 우주에 충만한 비로자나 법신불로 이해한다. 「  화엄경 」의 대부분은 부처님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세상 사사물물이 부처님 아닌 것이 아니므로 , 말이 있으면 그것은 바로 부처님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  화엄경 」은 이런 비유를 들어 부처님이 시시처처에 있다고 풀이한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그것은 무엇이든 다 태운다. 산이고 들이고 가릴 것 없다. 그러나 태울 것이 더 이상 없으면 불은 숨는다. 그렇다고 해서 불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일어나면 또 태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중생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있고, 방편을 베풀어 몸을 나타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몸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되어서, 무엇이 있다고 하면 바로 부처님이 있는 것이 된다.

    물론 「  화엄경 」에는 보살도나 선재동자의 구도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중생이 눈을 달라고 하면 눈을 주고, 내장을 달라고 하면 내장을 내어 주고, 중생이 나의 코와 귀를 베어 내더라도 성내지 않으면서 중생을 제도하려는 보살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부처님의 길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선재동자의 구도행도 부처님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모두 부처님에 관한 설명인 것이다.

    삼라만물이 부처님의 몸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성기性起를 말한다. 여래 또는 여래성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  화엄경 」의 부처님과 다른 불경의 부처님을 비교해 보면 그 특색이 더욱 드러난다. 「 법화경 」 의 부처님은 어떤가? 앞부분의 적문迹門에서는 역사적 부처님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고, 뒷부분의 본문에서는 같은 부처님이 자신은 초역사적 부처님이라고 신분을 밝힌다.

     금생에 처음 정각을 이룬 것이 아니라, 무량겁 전에 이미 불도를 이루었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고 성도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 법화경 」 에서는 석존이 무량겁 전에 성불한 본불本佛이라거나 모든 중생과 산천초목이 모두 부처님의 권속이라고 하지만, 「  화엄경 」처럼 한 부처님이 저 모든 것들에게 편만해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  법화경  」  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사사물물이 자신이 본래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확실한 본래 부처라거나, 모든 것에 부처의 성품이 포함되어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  화엄경 」처럼 하나와 여럿에 자재하는 한 부처님이 모든 것에 두루해 있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설사 「 법화경 」  과 「  화엄경 」이 똑같이 만법을 부처로 본다고 하더라도, 「 법화경 」 의 부처님은 시간적으로 무량겁 전에 성불한 것을 강조하고, 「  화엄경 」의 부처님은 공간적으로 모든 것에 편만해 있음을 강조한다.  「 반야경 」  계통으로 가면 부처님이 깃들이는 강조점이 달라진다. 부처님의 지혜인 반야바라밀이 바로 여래의 법신이라고 한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 금강경  」에도 이  「 반야경 」  계통에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방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 금강경 」은 우리가 형상에 의지해서 부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한다. 「 금강경 」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이나 사리탑이 있는 곳과 같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처님으로 받드는 것은 「 아함경 」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석존은 입멸 직전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즉 '참다운 자신과 진리를 의지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석존은 자신의 몸을 자신의 가르침에 담은 것이다. 자신이 가르친 진리가 바로 우주 법계의 존재 질서요,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법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  화엄경 」, 「 법화경 」,  「 반야경 」,  「 아함경 」의 부처님이 다른가? 아니다. 같다. 단지 역사적인 몸, 의인화된 진리의 몸, 본래성불, 우주 편만성 등 부처님의 다양함 가운데서 어떤 점을 강조했느냐가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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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


자비심은 헛되지 않고

착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이

곧 자비심이고 자비심이 곧 여래다.

                                                  ㅡ 열반경


<  산에 사는 날에 > /  조오현스님,  설악 무산 대종사님


나이는 뉘엿뉘엿한 해가 되었고

생각도 구부러진 등골뼈로 다 드러났으니

오늘은 젖비듬히 선 등걸을 짚어 본다.


그제는 한천사 한천 스님을 찾아가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 보았다

말로는 말 다할 수 없으니 운판 한번 쳐 보라,

했다.


이제는 정말이지 산에 사는 날에

하루는 풀벌레로 울고 하루는 풀꽃으로 웃고

그리고 흐름을 다한 흐름이나 볼 일이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열어보았으니  바빠서  공양간을감니다 .어서어서들오세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보살님!~

추운 겨울 날씨에 수고가 무척 많으십니다.

감사 감사드리며 저도 물리치료 끝내고 달려 가겠습니다.

  나무약사여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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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