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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 { 안면암 일기 } : < 034 식의 주객 분열 > 2021년 11월 16일 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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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4건 조회 1,946회 작성일 21-11-16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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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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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깨어 있어 잘 깨닫는 

그는 구담 부처님의 제자다.

낮이나 밤이나 법을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법에게 예배한다.


"나를 버리고 오직 불(佛)을 따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어찌 우리에게 속임이 있으랴.

"나를 버려라." "이웃을 사랑하라." 하실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생각하거나 , 더구나 그 결과의 허실를 의심할 것이 아니다.

요구의 출발의 근원이 인위적이 아니요, 우리에게 이미 비치되어 있는 부사의(不思議)한 생래적 충동이매, 어찌 그 감응의 실재(實在)에만 생명의 신비가 결여되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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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4      식의 주객 분열 


앞에서 아뢰야식과 업이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살펴보았다. 식의 종자가 현실을 낳고, 현실의 업이 다시 식종자를 훈습한다. 업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식종자는 또 다른 식종자를 탄생시키는데, 이 순환은 동시적으로 무한히 계속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실의 업을 낳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식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아뢰야식이 가설假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뜻 생각하면 안에 식이 있고 바깥에 그 대상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주체와 객체는 모두 식의 변화일 뿐이다. 식의 전변轉變으로 주객이 벌어진 것이다. 아뢰야식의 종자가 현실의 업을 낳는다는 것은 바로 이를 뜻한다.

    주체가 제멋대로 객체를 분별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밖에 실재하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식이 지어낸 것을 볼 뿐이란 말이다. 여중생 네 명이 동반해서 자살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어머니의 입원, 이성 문제 등을 괴로워하던 중에 집단으로 죽음을 택했다는 소식이다. 그 후 한 남중생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유는 가난이다. 우리가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자살 이유이다.

     그 아이들은 자기들 멋대로 실재하지도 않은 고통을 지어 내어서 느낀 것이다. 가난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죽은 아이들의 집보다도 더 경제적인 면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픈 사람도 많다. 그런데도 저 아이들은 죽음을 택해야 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저들의 고통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을 저들이 안다면, 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일방적인 관점에서 남을 평가하고 있다고 말이다. 어른들도 자살할 정도의 고통을 지어 낸 사건이 있었다. 아들의 사업 실패를 비관하고 한 노인이 자살했다. 그의 아들은 죽은 아버지와 피해를 입은 채권자들에 대한 죄책과 고통으로 또 자살했다.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다. 철부지 두 어린아이에게 농약을 먹여서 죽게 한 다음에, 아내와 함께 목을 매달았다. 3대에 걸친 다섯 명이 죽은 것이다.

    다른 이라면 살면서 받아 넘겼을 고통을, 저들은 죽음보다도 더 괴로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딸의 다른 시각도 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기만 하면 어머니를 괴롭히고 폭행까지 가한다. 무슨 이유에선지 어머니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러나 딸의 관점은 다르다. 아버지는 악마와 같다. 착한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 어느 날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사이에, 19세의 딸은 넥타이로 아버지의 목을 조여서 죽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본 아버지는 살아야 할 남편이었고, 딸이 본 아버지는 죽어 마땅한 극악인이었다. 한 사람을 두고 두 모녀가 달리 생각한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들만 들추었지만, 자기 생각에만 잠겨서 세상을 보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저 사건들의 주인공처럼 매스컴을 탈 만한 큰일을 저지르지는 않더라도, 언제나 내 중심으로 마음을 조이고 있다.

      나의 사랑, 영광, 미움, 병, 늙음, 죽음 등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치자. 이때 나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볼 수 없고, 설사 본다고 하더라도 내 식으로 풀이한다. 아뢰야식에서 분열된 한 쪽인 주체가 다른 한쪽인 객체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식으로부터 주객이 분열되었다고 해서, 식이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적인 물질 대상을 만들어 냈다는 뜻은 아니다.

    주객을 떠난 의미에서의 삼라만물은 어떤 것으로도 정해진 바가 없다. 이름도 없고 용도도 없다. 사람이 그것들을 보고 이름, 용도, 좋음, 나쁨, 아름다움, 추함 등의 분별을 붙이면서 무 상태의 자연계가 사람의 기분대로 어떤 개념으로 고착되고 왜곡된다는 말이다.

      만동자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석존은 침묵했다. 불교는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철학이 아니다. 마음을 살피고 깨우치게 하려는 종교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뢰야식이 주객으로 나누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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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께서 정성껏 키우시는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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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보살은 마땅히

항상 화합ㆍ인내ㆍ유순ㆍ공경을 행해야 할 것이며,

또한 다른 이를 부지런히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욕 가운데 머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발보리심경론>


                                         
안도현 /  일기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 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름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새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예경하고 언제나독켱하고  기도  경전  부처님가피입고예경문에 깊이 들어갈수록  빠르다  명훈가피력  제법무아  제행무상    적정으로들어가는  삼 법인이  찍혀야 불교라 한다    본 견해가  항상 내문제에적정 이었다  .  그후  깨달은 후는  항상  중생교화하는것  !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보살님!~

명훈 가피력 ㅡ 언제 가피를 입었는지도 모르게 자신이 달라지는 것

참 불자라면 한두 번쯤은 명훈가피력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귀한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정광월 합장님의 댓글

정광월 합장 작성일

들꽃이 아름답네요
오즈음  불사 점안식하는 절이 많네요

안면암  지장대원탑  점안식도 이루어 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