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 안면암 일기 } : < 041 무명의 시작과 끝 > 2021년 12월 2일 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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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1,453회 작성일 21-12-02 07:41본문
< 법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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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할 일은 행하라.
스스로 믿어서 씩씩하게 행하라.
어리석고 덤비는 외도(外道)를 떠나서
티끌을 날리기를 배우지 말라.
내가 동경하는 이상적 생활이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왜 실행하지 못하는가?
나의 내기(內氣)와 무력, 우유(優柔)와 고식(姑息),
더구나 나의 기약(氣弱)은,
하나의 불운으로써 다(多)의 행운까지 희생시키고 있다.
"우리는 우리 생활의 가장 아름다운 날을 계획에 허비한다." ㅡ 볼테르
그러나 나는 나의 그것을 다만 무위의 동경에만 허비하고 만다.

무명의 시작과 끝
불교는 모든 문제를 근본 미혹인 무명에 돌린다. 12인연설의 체계를 시작으로 모든 생멸의 현상 세계 설명에서 무명 때문에 일체의 업과 생사윤회의 고통이 벌어진다고 한다. 여래장 연기를 설하는 <기신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고요한 진여의 마음이 무명에 의해 훈습을 받고 흔들려 버리면 나고 죽는 세계가 일어난다고 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저 무명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만약 본래 없던 무명이 외부로부터 갑자기 날아 들어온 헛된 것이라면 그 근본이 가짜이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잘못되더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무명이 진여에서 나왔다면 진여가 본래부터 무명을 갖추고 있는 것이 된다. 진여와 무명이 한몸이라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무명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또 진여가 무명을 일으킬 수는 있으되 무명이 진여를 일으킬 수 없다면 처음에 진여가 있고 그 다음에 무명이 있는 것이 되어서, 무명이 처음부터 진여와 함께 있었다고 할 수가 없다.
<기신론>은 '무시무명無始無明'과 '홀연념기忽然念起'로 무명의 시초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시초를 알 수 없는 때부터 중생이 번뇌를 일으키고, 그것이 계속되기 때문에 무시무명이라고 하고, 또 중생이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사물을 규정하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명의 시초를 알려면 먼저 번뇌를 일으키기 이전의 상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생멸심의 시간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진여의 무시간적無時間的 또는 초시간적超時間的 세계를 파악할 수가 없다. 진여에서 무명으로 이동하는 경계는 중생의 경험으로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시초를 시간적으로 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무시무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논리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번뇌가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최초에 어디서부터 번뇌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명의 시작과 끝을 시간적인 의미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할까? 그렇지 않다. 말을 떠난 진여의 입장에서 본다면 입을 여는 것 자체가 허물이지만, 우리는 지금 중생의 말로 해탈로 가는 길을 그리려고 한다. 꿈속의 무서운 호랑이가 가짜이지만 그에 의해서 잠을 깰 수가 있으므로 호랑이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무명의 시작과 끝을 찾아본들 그것은 중생의 분별일 뿐이지만 그에 의해서 무명, 진여, 수행, 깨달음의 보다 진실한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보통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진여는 무시무종無始無終, 무명은 무시유종無始有終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진여는 영원하므로 시작과 끝이 없고, 부처를 이룬 다음에는 다시 윤회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무명은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심해서 애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해탈하면 다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처를 이루면 중생이 사는 태양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 가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이는 성불을 고정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된다.
해탈한 이 앞에 윤회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에 빠지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진여, 무명, 수행, 깨달음의 시작과 끝을 한꺼번에 정리할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있기로 말하면 다 같이 언제나 있고 없기로 말하면 다 같이 언제나 없다. 똑같이 무시무종이라는 말이다.
진여라는 물에 무명이라는 바람이 불어 와서 번뇌라는 파도가 일어난다면, 분명히 그 바람은 외부의 것이다. 그러나 진여 그 자체에 무명에 의해 흔들릴 성품이 없다면 무슨 재주로 무명이 진여를 흔들겠는가. 진여의 물은 본래부터 그리고 영원히 그 자체 번뇌의 바람에 의해 흔들릴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다시 생사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끝없는 해탈의 수행을 한다는 뜻이지, 어떤 고정적인 형태로 자신을 굳혀 버린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풀과 꽃 나무 거의 다 자기 할 일을 마치고 떠나가고 있지만,
겨울이 되자
#동백꽃은
다시금 되돌아와 사람들과 삼라만상을 기쁘게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장독대 옆의 붉디 붉은 토종 동백꽃입니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오늘의 부처님 말씀]
자기가 아는 대로 진실만을 말하라.
주고받은 말마다 좋은 말을 하여 듣는 이에게 편안함과 기쁨을 주어라.
ㅡ 잡보장경
< 황혼 > / 김초혜
빨리 흐르라고 /
떠밀지 않아도 /
낙엽 한 잎 띄우고 /
강물은 /
사정없이 흐른다.
< 진정한 나이 > / 김초혜
나이와 사이가 좋아지니까 /
사소한 것도 아름답다 /
나이를 못 따라가면 /
후회와 탄식이 쌓이고 /
너무 앞질러 가면 /
길잡이를 잃는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자비광명 함께 하는 푸른연꽃밭의 청정함으로 부처님 되세요 . 마음일어나는것을 자기가알아야. 참으로 진정성인가 십지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보살님!~
자기 마음 일어나는 것을
자기가 알아 차려야 한다는데
그것이 항상 쉽지 만은 않아 안타깝지요.
소중한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