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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 { 안면암 일기 } : < 035 식 속의 무한 순환 > 2021년 11월 17일 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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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4건 조회 1,996회 작성일 21-11-1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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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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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깨어 있어 잘 깨닫는 

그는 구담 부처님의 제자다.

낮이나 밤이나 중을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중에게 예배한다.


평화란 무엇인고? 싸움이 없는 평화만이 아니다. 싸움 속의 평화를 이름이다.

싸움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념(邪念)의 싸움이 나쁘기 때문이다.

서(恕)란 나쁜 것이 아니라, 회구(懷仇)의 따짐이 나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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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5      식 속의 무한 순환  

앞에서 아뢰야식이 종자가 분열해서 주관과 객관, 사람과 환경을 만든다는 유식의 주장에 대해서 몇몇 독자가 이의를 제기해 왔다. 사람이 보거나 말거나 알아주거나 말거나 자체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있고,한 가지 실재하는 사물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공통된 의식을 가지게 되는데 사람의 인식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저 실재를 어떻게 식의 분열로 설명하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서 전에 살짝 언급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선 불교는 인간 존재와 관련이 없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만동자가 석존에게 세상의 시간적 공간적 끝, 정신과 육체의 동일 여부, 사후의 존재에 대해서 물었을 때 석존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독화살을 맞은 사냥군과 불의 비유를 들었다.

    사냥꾼이 독화살을 맞았을 때 그 화살을 쏜 사람, 화살의 재질, 독의 종류, 날아온 방향 등을 철저히 조사한 다음에야 화살을 뽑으려고 한다면 그 조사가 끝나기 전에 사람은 죽고 말 것이다. 또 켜져 있던 촛불을 꺼지께 했을 경우, 그 불이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연료가 있으면 언제라도 불은 살릴 수 있고, 또 연료를 제거하면 불은 다시 숨기 때문이다.

    독자의 질문은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있다''는 것은 가정일 뿐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에 있고 아뢰야 속에 저장돼 있던 '업' 종자가 현실의 행위를 낳고 현실에서 짓는 업이 다시 '식' 종자를 낳는다.

    봄과 가을이 다르고 10년 전과 100년 후가 다르다. 한순간도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없다. 변하는 상태에 있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상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있다' 고 말하는 것은, 그가 자기의 시점에서 어느 한 때를 중심으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서울 방향 경부고속도로가 끝나는 지점인 양재동 오른편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고, 그 옆에 수십 그루 집단으로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이 보인다. 며칠 전에 온 비를 맞아 꽃잎이 많이 떨어졌다. 저것은 피고 있는가 지고 있는가. 사람은 저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핌과 짐, 있음과 없음, 아름다움과 착함, 좋아함과 싫어함, 살아있음과 죽음, 선과 악 등으로 의미와 가치를 붙여서 본다. 사람의 마음을 제거한다면 저 꽃들은 자연의 흐름 즉 끊엄없는 변화일 뿐이다. '있다'와 없다'가 없는 상태에 있다. 사람이 자기가 정한 이름과 개졈을 붙여놓고는 실재의 객관 세계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꽃에 대해서도 다겁생래로 축적해 온 자기의 업을 따라 이름과 개념을 붙이는데 사랑, 미움, 만남, 이별, 젊음, 늙음, 건강, 병, 태어남, 죽음, 행복, 불행 등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분별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유식은 바로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식이 주객으로 분열해서 자기가 지어낸 것을 자기가 본다고 강조하느 것이다.

    인식과 관련 없는 객체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현실의 행위가 식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훈습에도 연결된다.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던 업종자의 습관이 현실의 행위를 낳게 되는데, 현실에서 짓는 업은 다시 아뢰야식을 훈습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아뢰야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나온다.

    그렇다. 아뢰야식이라는 식종자가 고정체로 있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연속성을 같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편의상 식종자가 현실의 업을 낳고, 현실의 업이 식종자를 훈습하고 , 다시 훈습을 받는 식종자가 새로운 식종자를 낳는다고 구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아뢰야식의 속에서 맴도는 셈이다. 한 발자국도 아뢰야식 밖으로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어떤 이는 마음 밖의 존재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할지 모른다. 최근에 탐사한 화성이나 수많은 별들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 우리가 정한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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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고통을 무서워하고 싫어하거든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가 계속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대는 영원히 괴로움의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소부경전 -


      < 헛헛한 웃음 > /  황동규     

   
요새 뭘 하지?

뭘 하다니?

선산 도리사(挑李寺).

갓 스쳐간 낮비에 젖은 길 내려가

소나무 우듬지들 한가운데

아도화상 바위 의자에 올라 모양새 갖추고

오뉴월 몰려드는 생각의 검은 구름 떼를

짝퉁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잠재우려 든 일도

벌써 두 달여, 볕 여직  따가워도

저녁 어스름 바투 밀려오기 시작하는데

뭘 하고 있지?

뭘 하든 않든 아침저녁으로

하늘과 땅이 서로 들고 난 곳을 새로 맞춰보는

소나무들이 솔가리를 촘촘히 빗질해 내려보내는가을이 오고 있겠지.

그래 그 가을의 문턱에서 지금 뭘 해?

여름내 속으로 미워한 자 하나

내처 미워할까 말가 망설이고 있지.

그 할까 말까가 바로 피 말리는 일,

아예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 미워하든가

마음에서 슬쩍 지워버리는 거야.

아니면 어느샌가 바위에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저녁,

바위의 피부를 간질이는 가벼운 햇볕,

볕이 춤춰, 하면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가만히 춤추다가

생판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한번 헛헛하게 웃든가?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길고넓은 아미타부처님  아니계신곳없으신  불신장관 상호무변금새콰영    변조법계  십 불급중생  시상무차별    반야심경으로보면  무새미고  조견이고  무량광 무량수  비추는 대괴영  남과  죽음이없이  그늘이없는 대적광    죽음이두렵지않는 맞서서  생사에공부해야한다 .  일상생활 아미타불  , ., , ....,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보살님!~

한결같은 귀한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정광월 합장님의 댓글

정광월 합장 작성일

가을  바다 가을 하늘  구름
구름 모양이  딴 계절과  달라요

오늘 수능이라
시작전 동네 절 와 봤어요
모두들 대박 나서
수능  학업 성취 이루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