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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 { 안면암 일기 } : < 혹업고惑業苦와 십이인연 > [석지명 큰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불교 교리]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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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2건 조회 1,606회 작성일 21-10-19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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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270

이른바 유도(有道:성중聖衆)란,

하나의 생명만을 구하는 것 아니다.

널리 온 천하 두루 건져

해침이 없는 것을 '도'라 하나니.


잔학무쌍한, 독인(毒刃)을 쥐고 넘어진 적의 시체 위에 한 줌의 꽃을 던져 명복을 빈 여성이 있었다 한다.

여기에 일체의 이론을 버려라.

'사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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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7   혹업고惑業苦와 십이인연 


미혹, 악업, 고통이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고 한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불교는 모든 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다른 종교에서는 절대자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말함으로써 세상의 시작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고통의 뿌리를 추적해 가다가는 중도에서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는 논리로 어물쩍하면서 최초의 근본 찾기를 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불교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려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전생과 윤회가 초현실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인드의 모든 살마들이 곷통으로 가진 문화이다, 또 불경에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빛이 퍼지고 땅이 흔들리는 등의 법회 장면 묘사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문학적인 표현일 뿐이다. 다른 종교의 경전에서처럼 기적을 내세워서 교주가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주의 시원인 창조자를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의 경험에 기초한 불교는 과학이 발전할수록 그 심오함이 증명된다. 다른 종교에서처럼 과학과 배치되는 일은 없다. 또 우주의 시원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만약 최초의 조불주가 있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는 그 조물주는 누가 만들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만약 본래 있었다고 한다면, 그 본래 있는 상태에 대해서 물을 것이다. 조물주를 묻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만약 묻기로 한다면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면 조물주론은 항복할 수밖에 없다. 또 계란과 닭, 볍씨와 벼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혹업고를 보다 자세하게 인간의 생존 현실로 설명한 것이 십이연기인데, 이것은 미혹 무명을 그 출발점으로 잡고 있다. 미혹 때문에 인간사의 모든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미혹을 다른 종교에서처럼 우주의 시원으로 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어리석음을 뜻하는것이지, 우주가 벌어질 때 있으리라고 상상되는 최초의 혼돈이나 어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십이연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미혹 무명으로 인해서 윤회의 세계로 가는 업이 있고, 윤회의 업으로 인해서 자기를 내세우는 인식이 나온다. 이 인식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을 만들고, 계속해서 여섯 가지 감각 기관, 감촉, 느낌, 사랑, 갈애, 존재, 태어남, 늙고 뱡들고 죽는 고통으로 이어진다. 열두 가지의 하나하나는 미혹이나 업이나 고통 가운데의 하나에 속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줄이면 혹업고가 된다.

    십이연기가 미숙한 쪽에서 성숙한 쪽으로 발전해 가는 면을 보고, 어떤 이는 생태학적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사람이 뱃속의 태에 들어설 때부터 늙어죽을 때까지를 묘사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찰나에 일어나는 심리적인 현상을 나타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풀이할 수 있지만, 십이연기가 혹업고로 압축된다는 데는 다를 바 없다.

    십이연기의 세 번째 가지에 인식이 있고 열 번째 가지에는 존재가 있다. 불교에서 마음의 연기를 밝히는 유식사상과, 존재에 실체가 없음을 밝히는 공사상이 큰 축을 이루면서 발전해 왔는데, 그 뿌리가 여기에 다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의 인식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만법유식萬法唯識의 연기론이 되고, 존재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만법개공萬法皆空의 실상론이 된다, 그러나 인식과 존재는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한 줄기이다. 인식의 존재이고 존재의 인식이다. 우리는 앞에서 혹업고가 동시적이고 상호 포함적이라고 읽은 바 있다.

    십이연기의 열두 가지도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에는 다른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무명에는 업과 잘못된 인식과 갈애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인식이라 함은 미혹한 업의 인식이다.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존재라는 것은 미혹한 업으로 갈애에 차서 인식한 것일 뿐이다. 태어남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혹업고가 미혹의 길이고, 이를 뒤집은 반야, 수행, 법신이 해탈의 길이듯이, 십이연기에도 미혹의 길과 해탈의 길이 있다.


     무명을 따라 업을 짓고 자기중심으로 분별하면 생사윤회로 갈 것이지만, 미혹을 지혜로 돌리고, 업을 수행으로 돌린다면 해탈열반의 길로 이어진다. 그래서 불경은 "무명으로 인해 윤회의 행위가 있고, 이 윤회의 업으로 인해 아집에 찬 잘못된 인식이 있고. . .." 라고 설하는가 하면, "무명이 멸하면 윤회의 행위가 멸하고, 윤회의 행위가 멸하면 아집에 찬 인식이 멸하고. . ."라고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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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오늘의 부처님 말씀}

인간의 귀천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귀천은 오로지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

천한 사람은
항상 천박하게 행동하고
귀한 사람은
고귀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따라
천한 사람도 될 수 있고
귀한 사람도 될 수 있다.
                                      - 유행경 -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제법이전부  인연법이라  .잘믿고잘닦보합시다  .항상  상호관계로이뤄진다  .법성신은  매날  죽어도    상즉무이상  아무리 아리 죽어도    죽음이아니고    불생불멸  증분  고분이라확실히  아는게  깨달음  확실히 믿는것이    일심이다  .  인여나서가  하나도 없다  .  근본은나    일체법심이요  어언은  대요정      진실은  선지식이다  .    법성 원융무이상    불생불멸  색상  무진이요    ,  ㄱ대로  불생불멸의  정각    지입제상  지혜가불생불멸  일념찰라 즉시  무량겁    지입삼세  에들어간다  .  해탈이다    원융무애    일승  증득하여  잘믿고 잘닦읍시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