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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 { 안면암 일기 } : < 016 당처성불當處成佛과 전제 > [석지명 큰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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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1,703회 작성일 21-10-27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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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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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어진 것은 괴로움이다."

이렇게 지혜로써 깨달은 사람은,

괴로움을 진실로 느끼지 않아

일마다 그 자취를 깨끗이 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  수생(受生)한다는 것은 곧 수난(受難)'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전제를 크게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치는

그 난(難: 生)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요,

또 그 난의 수수께끼는 일생을 걸어 몸소 해결하는 외에

생의 고난, 생의 광영(光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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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당처성불當處成佛과 전제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 부처가 된 가능성이란 없던 부처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인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뜻한다. 성구는 중생 속에 부처가 포함되어 있고, 부처 속에 중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불이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구, 본래성불, 불이의 입장에서 보면, 처처에 부처가 있다. 바로 처처성불處處成佛  또는 당처성불當處成佛이다.

      성구, 본래성불, 또는 불이를 읽어 온 독자는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불교는 무작정 낙관주의, 현실 외면주의, 환상적 공론주의 같다. 세상은 문제로 가득 차 있다. 악, 부정, 불의, 부조리로 꽉 차 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세상은 무상하고 고통스럽다. 이 세상을 바로 눈앞에 두고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본래 부처라느니, 지옥 속에도 부처가 있다느니, 당처성불이라느니 하고 있으니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불교는 고통 받는 사람에게 계속적으로 고통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고통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최면의 종교인가? 불교는 세상의 문제와 고통을 보지 않으려 하거나, 그것들로부터 도망가려고만 하고, 한 가지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니, 그 구제라고 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

      불이나 당처성불 사상은 이런 혐의를 받기 십상이다. 이미 과거에도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부당하게 인권을 유린당하고 억압받는 피지배자들의 불만을 없애기 위해서 지배자들이 악용하기 쉬운 교리 체계라는 것이다, 대중들을 핍박하면거,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전생에 그들이 지은 업의 과보로 돌리거나, 아니면 괴로운 현실을 극락세계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억압자의 논리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배자에 의해서 불교가 악용된 예를 옛날 왕조 시대의 중국 역사에서 찾기도 한다. 불교가 서민 대중보다는 왕실에 더 친해지려고 노력했고 , 권력자에게 국민들을 구슬리는 논리를 제공하는데 주력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도 나쁜 쪽으로 악용될 수 있다. 불은 음식을 만들고 난방을 하는데 귀중하게 쓰니는 것이지만, 집이나 산림을 태우는 쪽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 칼도 생활에 유익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과학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세상에서 모든 성냥과 칼과 과학을 없애려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불교 교리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얼마든지 악용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교리가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되는 것을 위주로 풀이해서 정당하게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또 있다. 중생과 부처의 불이나 당처성불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수행이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곳에 본래 부처가 있을 수 있다. 수행과 깨달음이 없는 이에게는 지옥은 분명히 지옥이고, 축생은 분명히 축생이다. 지옥과 극락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니라고 해서, 수행이 없는 미혹한 이에게도 이것이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처처에 부처가 있다는 것은, 부처의 생각과 부처의 행동을 하는 곳에 부처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도 한때나마 부처처럼 행동할 수 있다. 본래의 자기, 즉 본래 부처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깊은 수행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자기 마음을 1분이라도 한결같이 지키기가 힘들다. 1분간 부처의 마음을 가지기가 어렵다.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의 행동을 한다면, 그 짧은 기간에만 부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다시 인간이나 아수라로 바뀌었다면, 그는 다시 인간과 아수라로 돌아온 것이다. 당처의 성불이나 모든 곳에 부처가 있다는 말이 끌어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수행이다. 아무리 본래성불이나 성구 또는 불이를 들이대도 수행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현실회피주의나 낙관주의가 아니다. 끊임없는 노력주의이다. 수행이란 바로 문제를 해소시키려는 내면 또는 외면에서의 다각적인 노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불교는 우리의 참 생명을 외형적인 물질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안으로 즉 내적인 깨달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고 육체적인 고통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푸는 방법이 내향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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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과거도 내려놓으라.

미래도 내려놓으라.

현재도 내려놓으라.

존재의 저 언덕을 건너서

마음이 일체에서 벗어나면 그대는 또 다시 태어남과 늙음을 겪지 않으리."

<담마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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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부처님세계를어텋게  믿어야되는가?      신심  발심  보살행  부천ㅁ  석가모니  능인  인덕이  가능한 것  명호에  대웅  세존  인격화된  여래  진리모습    불    자족  만족  능인  지혜자비  를  자족 하지못하면 지속적 가능한선행  스스로  만족해야한다  .인덕과  능인을이룬다  아미타불  수명이  죽음이없고  어둡이  없다  .진리에는느끼지만  존재하지않다  .  여실지  감각에  착오로느껴진것  여실견의 진리는  암흑과사망이없다  .  .아미타는  광명이  무량하고  수명이  한량없다  .  우리몸전체는  변하고 바뀌는것을  감각의  현상 변역    변하고 바뀌는것뿐  생각이  지혜로바뀐다    끝없는  광명    대광명의 비로자나불      생각이  떠나서는  안된다    .  나무  약사여래불  .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보살님!~

우리들 안면암의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모셨습니다.

광명이 무량하고 수명이 한량 없으신

아미타부처님처럼

안면암이 시방법계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귀의한 모든 선재님들께서 무량한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시기를 비옵니다.

그리고 안면암 지킴이 보살님

#무량이 #항순이도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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