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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 { 안면암 일기 } : < 017 진속이제 > [석지명 큰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불교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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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6건 조회 3,147회 작성일 21-10-28 07:38

본문



<법구경>

279

"모든 지어진 것은 실체가 없다."

이렇게 지혜로써 깨달은 사람은,

괴로움을 진실로 느끼지 않아

일마다 그 자취를 깨끗이 한다.


우주에 절대적 단일인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지소(至小)한 실체의 변명(變名)이요, 그 단일 속에는 무수한 사물이 존재한다.

절대적 단일에는 존재의 형식이 있을 수 없고,

형식 없는 실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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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진속이제 

성철스님이 설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문 구절은 불교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이 한 번 이상은 들었을 것이다. 또 [금강경]에는 "갑은 갑이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갑이다."라는 식의 표현이 많이 있다.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며 단지 그 이름이 장엄이다."라든지 "여래가 설한 세계는 세계가 아니고 단지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라는 식의 논리이다.

     성철 스님의 법문이나 [금강경]의 연속적인 긍정과 부정은 초심자들을 난감하게 만든다. 불교에는 두 가지 진리가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통속적인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통속적인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참다운 또는 궁극적인 진리이다. 통속적인 진리는 불교에서 속제俗諦라는 이름으로, 참 진리는 진제眞諦라는 이름이로 쓰인다. 그런데 똑같은 용어가 한 문장이나 문단에서 속제적인 의미나 진제적인 의미로 자주 뒤바뀌면서 혼용될 때, 초심자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이 아니다."로 이어지고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된다. 처음 글귀는 속제이고 두 번째 글귀는 진제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진제와 속제를 포괄하고 초월하는 중도의 진리이다. '산'이나 '물'이라는 이름과 개념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또 상호의존의 연기법과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을 물이 아니다. 앞산과 그 아래 계곡의 물에 1억년만 더하거나 빼 보라. 산은 항상 산이 아니고 물은 항상 물이 아니다. 그러나 형상과 이름으로 보고 알아야 하는 우리는 눈앞의 산과 물을 지우고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속제와 진제 다음에 중도의 진리가 나타나게 된다. 이때 속제와 진제는 한꺼번에 속제로 되고, 중도의 진리가 진제가 된다. "이다"와 "아니다"가 속제가 되고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가 진제가 된 것이다. 이 같은 속제와 진제의 변증법적인 발전은 무한히 계속될 수 있지만,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세 번째의 진제만을 들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했을 뿐이다. [금강경]에서의 긍정, 부정, 긍정도 마찬가지다. 왜 두 가지 진리가 필요한가. 단번에 진제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상에 의지해서 보고, 개념에 의지해서 생각한다. 가령 사름들이 궁극의 도에 대해서 이말 저말을 붙인다고 치자. 그들이 참다운 도에 이르려면 말을 떠나야 한다. 말을 멈추라는 신호로 죽비를 친다. 그러나 여기서 말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죽비도 "조용히 하라."는 의미의 말과 다름없다. 말을 하지 말라고 죽비를 쳤지만, 우리는 말을 멈추기 위해서라도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가 꿈속에 있는데, 아무도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고 치자. 진리의 세계은 꿈을 깨는 것이다. 꿈속에 호랑이가 있다면 그것은 가짜다. 그러나 꿈속에서라도 무섭게 보이는 가짜 호랑이가 잠자는 우리를 깨울 수 있다. 통속 세계의 수행, 즉 속제도 우리를 진제로 안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손가락은 분명히 달이 아니지만 달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소승불교는 아주 낮은 수준의 가르침이다. 대숭불교 내에서도 입장과 시각에 따라소 어떤 경전은 낮은 단계의 방편이고 다른 것은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다시 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불경이 속제의 가르침에 불과하다. 말이 있는 데서 말이 없는 데로 들어가야 하고 또 중생의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게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소승불교는 아주 낮은 단계의 가르침이다. 대승불교 내에서도 입장과 시각에 따라서 어떤 경전은 낮은 단계의 방편이고 다른 것은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다시 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불경이 속제의 가르침에 불과하다. 말이 있는 데서 말이 없는 데로 들어가야 하고 또 중생의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속제가 진제에 들기 위한 방편이라면 궁극의 목적지는 진제의 세계인가? 이 대답은 간단치가 않다. 왜냐하면, 속제와 진제의 단계는 변증법적으로 무한히 발전해 나가서 끝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궁극적인 것이라고 집어서 사람의 말로 그것에 얽어매는 순간 이미 그것은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속제가 된다.     


참다운 진제는 속제의 합일에 있다. 궁극의 목표는 속세로부터 진제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속제와 진제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드라마가 끝난 후에 NG모음을 보여 주는 수가 있다. 드라마는 일부러 꾸민 속제이고, NG에서의 웃음은 드라마가 속제라는 것을 아는 진제이다. 드라마 속에서의 선인이나 악인은 가짜이다. 실제로는 선인도 악인도 없다. 참다운 도의 경지는 드라마에서도 NG 모음을 보고, NG에서도 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뭔가 얻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래 무소득 

이 도리를 깨달으면 일체가 소득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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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오늘의 부처님 말씀]

"욕심에 물들어 미혹하는 것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이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여

모든 악이 이를 따라 일어난다."
                                                      <제법집요경>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결함이없는 도덕성을 갖어라  .  상선약수    도에가까운것시 물이지만  즉  가장낯은곳에있다    그물은  어디에갖다놔도  다맞는다  .유연성 . 도덕성 !  불신을얻는방법은 ?  건강  경제  력  지혜능력  무엇이 만족이있어  함부로할수  있겠는가?  나의  인생을  부처님께  비춰볼때  나의  그릇이 법신불이  되고자  무량공덕  지혜를닦아 마음속의  지혜능력을    번쩍 빛나게  닦아야한다  .  그릇을만든다  .  몸과  마음에고요 선정을닦는다  .  시끄러운  마음을  흐르는물은  빨래 목욕도  하지만    연못에 가라앉은물은    못막는다  .  훌륭한  불자가되기위하여  노력한다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갈매기들이  .., .,,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보살님!~

상선약수(上善若水)  ㅡ  노자 <도덕경>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
                              아상이 없이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물,
                              몸을 낮추어 겸손하며
                              유정부정 모두에게 항상 최선의  이로움을 주는 <물>

                      훌륭한 불자가 되기 위해서
                      모름지기
                      우리는 상선약수를 본받아야겠지요.


                              구름 한 점 없는
                              안면암 하늘에서 무리지어 활공하는                 
                              갈매기들의 대자유가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정광월 합장님의 댓글

정광월 합장 작성일

동국대 혜화관 앞 벤치
오래전 가을  때와  느낌이 다른
그땐 또래의 보살들이  공부하신다고
지나가던 모습이 부러웠었는데
오늘은 세미나장 통도사 젊은 스님 젊은 보살들이
미리 와 계심
그땐 바람이 많이
오늘은 따뜻한
구하,한암  큰스님 세미나
저도 일찍 왔으나 이미
스님들께서 좌석이 없어  이리 저리
좌석 비워주고 벤치에 앉아 있어요
가산불교연구원 지관 대종사님께 같이 공부하던 보살님
몇년전에 김호성  교수님 밑에서 공부하신다고
오늘 중단 했다고
11월 세미나 많으니 자주 만나자고
동국대 오랫만에
예전엔 도서관에서 과천  포교당 신도 대학원 논문집도 보고
머물고 있고
신경림 시인의 시집에 싸인도 받고
본관 건물에
허허 지명 대종사님의
학교  기부금    새겨진    봤어요

              정광월 합장

ybr님의 댓글

ybr 작성일

참 좋은 도반 , 정광월보살님!~

고희의 연세에도 신앙심과 문화생활을 맘껏 향유하시니 대단히 부럽습니다.

건강이 뒷받침되니 이 얼마나 좋은가요?

다음 기회에는 저도 꼭 함께 동참했으면 합니다.

귀하고 즐거운 소식 들려 주시어 대단히 감사드리며

댓글에도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정광월 합장님의 댓글

정광월 합장 작성일

학교 벤치에 앉아서  나이  많은데  참석해도 되는지  생각했어요
집에  와서  피곤해 놀이터  오래 앉아 있었어요
내일 호압사 세미나  국제회의장에서 있다고
같이 공부한 비구니 스님과 약속  했는데
동네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