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 안면암 일기 } : < 포용의 전통을 되살리자 > {석지명 큰스님 산문집}에서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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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2건 조회 1,929회 작성일 21-10-03 18:28본문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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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는 새의 발자국이 없고,
사문에게는 다른 뜻이 없다.
세상은 모두 항상됨이 없지만
부처님만 항상 계신다.
불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대로의 자성을 지키는 의 진제(眞際)의 실재(實在)요, 자아 전일(全一)이다. 공간을 떠났으며 편재(遍在)요, 시간을 떠났으며 영원이다. 편재이매 대소(大小)에 동일하고, 영원이매 지속(遲速)에 자유이다. 그러매 시공을 초월한 거기에는, 시공의 진행은 서로 융합하는 것이다.
포용의 전통을 되살리자
음력 7월에는 많은 불자들이 각기 ‘우리 절’을 찾아 참배했다. 이달에 칠석과 백중(, 음력 7월 보름날. 불가에서는 를 마친 뒤 대중 앞에 허물을 말하며 참회를 구하고, 절에서 재를 올림. 하안거란 장마철인 음력 4월 15일부터 석달 동안 한방에 모여 수행하는 일을 말한다) 법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보살님’들은 일년에 많아야 세 번쯤 절에 가면서도 자신이 대대로 맥을 이어온 당당한 불교신자라고 믿는다.
그 세 번이란 정월, 4월 초파일, 그리고 칠석이다. 그들은 이런 날들을 불교신자가 지켜야 할 가장 성스러운 날로 생각한다. 청담스님을 비롯한 많은 큰스님들이 칠성각을 부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법불교 믿기 운동‘을 편 적이 있다. 지금도 많은 불교 지도자들이 칠성이나 산신에 대한 신앙은 더 높은 단계의 믿음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외친다. 칠석보다는 백중 우란분(은 범어 ’울람바‘에서 온 말로 , 아귀도 에 떨어져 괴로워하는 망령을 위안하는 행사) 재일이 천만배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대중;은 들은 체를 하지 않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칠석에 모이는 이들이 백중에 모이는 숫자보다 훨씬 더 많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문제를 만난다. “원시적 토속신앙과 불교를 구별해서 왜 정법을 믿지 않고 비법에 빠지느냐고 더욱 큰 소리로 화를 내느냐, 아니면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인연 있는 모든 신앙을 불교가 포용해서 불교적인 것으로 소화하느냐”는 질문이다. 인도에서 전통신앙인 힌두교에 대한 발전적 반발로 생겨난 불교가 훗날 대승불교에 가서는 힌두교와 다시 밀착해진다. 그래서 중국, 티벳, 한국, 일본 등에 퍼진 소위 ‘북방불교’의 교리적 골격은 이미 형태상에서는 원시 불교와 판이하게 달라지고 힌두교화버렸다.
물론 대승불교는 나름대로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돌아간다”거나 “모양은 달라졌지만 불교의 본래 취지는 더욱 살린다”고 주장한다. 중국에 넘어와서 자리를 잡은 불교는 인도의 불교와는 또 다르다. 내용면에서는 지하수처럼 흐르는 일치점이 있지만 형태면으로 본다면 인도, 티벳, 중국, 몽고, 한국, 일본 불교가 약간씩 다르다.
여기서 어느 불교을 정법불교라고 하고 다른 불교를 비법불교라고 가르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에 보면, 부처님이 길을 가다가 동서남북과 위아래를 향해서 절을 하는 한 청년을 만난다. 서양종교의 지도자라면 그 청년에게 “쓸데없는 일을 한다”거나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나무라거나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반응은 달랐다. “그대가 여섯 방향으로 절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냥 절만 할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제, 부자, 군신 등의 관계를 비롯한 재가불자의 생활윤리를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교화태도, 즉 상대가 이미 가진 신앙형태를 파괴하거나 바꾸지 않고 의미만 바꾸는 방법을 ‘전의법’이라고 한다. 기존의 신앙에 뜻만을 바꾸는 전법은 불교가 전파되어가는 자취를 본래 형태의 고수가 아닌 끊임없는 이단 포용의 역사로 만든다. 서양에서 발달한 종교는 정통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이단이다.
이교 와 싸우고, 종교재판에 의해 교리해석이 다른 이들을 처단하고, 피 흘리는 전쟁을 일으키곤 했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이슬람교의 아랍 국가들과 유태교나 기독교의 이스라엘과 서방국들 간의 전쟁도 종교간 대결의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그러나 불교를 받아들이는 국가 사이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언젠가 기독교신학자인 변선환, 홍정수 교수 등이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거나 육체적인 부활보다는 정신적인 부활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을 통해서 출교 판결을 받기도 했는데 불교에서는 그러한 종교재판이 있을 수가 없다. 궁극점을 해석하는 끝없는 가능성이 열려 있고 다양한 시대환경에 변화 있게 적응하는 보응성 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또 서양종교는 한국에 전교를 시작한 뒤로 한국 고유 문화 의식을 무자비하게 파괴해왔다. 예를 들면 조상숭배방법을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 기독교 교파 대부분은 전통의례의 제사를 금지해서 가족간의 갈등을 촉발시키곤 했다. 그러나 불교는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집이 있을 경우에도 제사형태는 그대로 두고 추모하고 천도하는 의미만을 바꾸어왔다. 칠성, 산신 등에 대한 신앙도 마찬가지다. 형태는 이나 한국의 토속신앙이지만 , 그 내용은 불교의 무변화신 사상이 활용된 불교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정도 와 사도에 대한 불교의 시각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성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가 사도다. 부처를 알아볼 수 있는 이는 오직 부처뿐이다.
물론 우리 중생계에서 정신과 사신 을 가르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어떤 신앙이, 한편으로는 그 시대의 과학, 윤리, 사회이익 등에 관한 상식과 배치되지 않는지 여부와,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기본인 공사상과 일체유심조사상의 취지와 일치되는지 여부가 판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공중 휴거를 들먹이며 인류의 종말을 외치는 일부 광신적 기독교인들은 오늘날의 과학상식으로 판단하거나, 멀쩡한 학생들을 터무니없는 종말론으로 유인하여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것으로 보아 삿된 믿음으로 구별된다. 또 점치는 무당과 불교의 사찰이 칠성이나 산신을 섬기는 겉모양은 똑같지만 공사상과 일체유심조사상에 입각해서 중생을 구제하는 종교적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있다.
더욱이 점치는 이의 주된 관심사는 돈벌이고 불교의 원칙적인 관심사는 교화다. 그래서 정신과 사신을 확연하고 냉정하게 구별해야 하지만, 한국에서 이미 불교화한 토착신앙을 비불교적인 것으로 가르고 배척하는 데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일등을 한 황영조 선수는 인터뷰에서 , 자신의 좋은 기록을 위해 절에 가서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려준 어머니를 최우선으로 해서 후원자와 국민께 아울러 금메달을 얻은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들에게 불가사의한 든든함과 힘 그리고 굳은 결의를 준 것은 어머니의 기도 그 자체다. 기도의 대상이 부처님, 보살, 나한, 산신, 또는 칠성이었느냐에 따라서 그 효과가 증감되지는 않는다. 장독에 옥수를 떠놓고 천수경을 외우면 어떻고, 부처님 앞에서 칠성경을 외운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화엄, 천태 , 선 의 기초 교지나 사상이 다 같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단을 포용하는 전통을 뒷받침한다. 화엄은 탐욕과 번뇌에 찬 현상이 본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천태는 현상 그 자체가 바로 본체임을 강조한다.
선에서는 “일일시호일 ” 즉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로 탐착의 현실세계를 떠나서 따로 궁극세계를 찾을 수 없다는 견지다. 이 현실긍정 또는 현실포용의 견지를 잘못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종교와 사회에 부조리나 불의 가 있을 경우에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무조건 긍정해서 현실에 안주하는 문제회피의 태도가 나타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이 긍정이나 포용에는 전제가 있다. 현재의 형태는 그대로더라도 의미의 혁명적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와 전체가 일치될 수 있는 불교적 이상점을 그 현실 상황 자체에서 찾아내고 그 의미를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갈 태세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또는 기독교에 의해서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그 세력이 커지기 전까지, 불교는 토속 신앙을 흡수하고 포용하면서 어렵고 그늘 속에 사는 이들의 마음 달래는 일을 아쉬운 대로 잘해왔다. 그러나 도시나 시골, 학교나 공장, 정계, 경제계, 언론계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엄청난 세력으로 퍼진 현 상황에서, 불교는 타종교를 흡입하거나 포용하는 일은 고사하고 자기 울타리를 방어하는 일마저 감당해내기 어려운 실정에 처했다. 전통적인 포용능력에 적신호가 울린 것은 기독교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에 참여한 사찰은 몇 개 되지 않고 기독교회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일보에서 주최하는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에 참여한 사찰의 수도 열 손가락 미만이고 교회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원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시대는 변하고, 종교에 대한 사회적 요구도 바뀐다. 종교에 대한 서양의 정의나 기대가 동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만 모든 국민의 생활문화가 서양화한 이 시점에 우리 불교만 예속화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현 산업사회나 기독교의 만연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새로운 전의법의 방편으로 그들과 공존할 궁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교리가 모든 학생과 일반인의 상식처럼 된 마당에 기독교의 교리를 불교교리로 번역하거나, 불교의 교리를 기독교의 교리로 번역하는 착상까지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교리는 하찮은 인천교에 불과하니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무시하지 말고, 그 초보적인 인천교를 어떻게 활용해서 저 같은 힘을 발휘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미륵부처님과 여심(女心)
노란 국화를 보시게 된 칠순이 훨씬 넘은 할머니가
자식들 앞에서 환한 표정으로 사진 모델이 되고 계십니다.
곧바로 어린 손자와 함께 행복한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 가시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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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만일 훌륭한 삶을 사는 지혜로운 사람인,
함께 지낼 분별 있는 친구를 얻는다면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기
쁘게 그리고 주의 깊게 그와 함께 가라."
<담마빠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우리는 윤회의고통에서 벗이나야된다 . 가만의 몸 ! 내인생의 소중한 '어제오늘 전생내생 현생 ...불자의 내일 불자의 나 . 나의 내생 이빨리온다 의 수행 ' ..윤회의삶은 치우자 보리심과 공성 고귀한 인생 사람몸받은 지금 밝은 깨달음! 보리도차제를 알고 즉 깨달음의순서. 해탈의 순 서 코구멍 없는 ? 정법에서 생 명을알고 내주심 청 문의 힘 등주심 사유의힘 . 나자신에 죄짓는 일을 하지않아야한다 . 무상 즉 공 ! 나무아미타불 ..'사람으로 가만 하여 천상 으로 정진합시다 선업으로 ...관세음보살 삼보님께 귀의 합니다 .더나은단계로 지금이순간 사람몸밭기정 말 어려운 몸은 물바울 처럼 사라질 물거품과같은 삶이지만 내일보다 내생 을 알고 귀한 조건을 알고 ....부천ㅁ가르침으로 저의선업 공더으로 번 뇌에서 벗어나게하여지이다 나무 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