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고적한 산사의 청량한 매미소리> 2021년 8월 6일 金 (음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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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5건 조회 3,549회 작성일 21-08-06 10:50본문

15. 안락품(安樂品)
병사 왕과 불가사 왕은 친한 사이였다. 불가사는 칠보 꽃을 만들어 병사 왕에게 보냈다. 병사는 이것을 부처님에게 올리면서 말했다.
"불가사 왕은 나의 친구로서 내게 이 꽃을 보냈습니다. 나는 무엇으로써 그에게 답례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아직 불도를 모릅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그 마음이 열려, 부처님을 뵈옵고, 부처님의 법을 듣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공경하게 하소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십이인연경」을 베껴서 그에게 보내라. 그는 반드시 신해(信解)할 것이다."
왕은 곧 경전을 베끼고 따로 글을 덧붙였다.
"당신이 보내신 보배꽃에 답해서 나는 법의 꽃을 보냅니다. 그 뜻을 자세히 생각하고 부지런히 읽어 도의 뜻을 같이 맛보았으면 합니다."
불가사의 왕은 그 경전을 읽고 또 읽어, 깊이 믿는 바 있어 탄식하면서 "도의 힘은 참으로 묘해서, 그 깊은 뜻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세상의 모든 영화와 향락을 번뇌의 근본이요, 오랜 과거로부터 익혀 온 미혹이다. 내 이제 이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ㅡ 법구비유경, 유념품
197
원망 속에 있어서 노염 없으매
내 생은 이미 편안하여라.
모든 사람 서로 원망하는 속에서
나 혼자만이라도 원망 없이 살아가자.
사람에 호인(好人). 양민(良民)이 있듯이, 이 사회가 너무 호사회(好社會)인 듯이 보이는 때가 있다.
그러매 우리는 그 속에서 많은 회피의 초월, 유약(柔弱)의 선(善), 무골(無骨)의 관용, 극단의 철저, 자기(自棄)의 자만, 요설의 웅변을 볼 수 있다.
사랑은 쉼 ㅡ
나는 한때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다. 어느 스님에 의하면 특정한 사람을 사랑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출가인出家人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해야 하는데,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쏟는 사랑보다 다른 중생에게 향하는 사랑이 약할 터이므로 평등 사랑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그런데 다른 스님은 "반드시 한 사람을 사랑해야만 만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익힐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 스님의 주장은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만인을 사랑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절집에서 살아오면서 "훌륭한 고승이 되어 만중생에게 가없는 사랑을 베풀어라"는 가르침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듣곤 했다. 사랑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고승이 되는 일과 사랑을 제대로 하는 일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없었다.
고승이 되어서 내게 기대를 거는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어느날, 조실스님 방문을 두들겼다. 위의 두 가지 사랑 중 어느 쪽이 옳은지 가려주십사고 여쭙기 위해서였다. 한참동안 아무 말씀 없이 주먹만한 염주알을 굴리던 조실스님은 갑자기 "쉬어라. 네가 말한 두 가지 사랑이 다 가짜니라. 고승이 되는 길은 고승이 된다는 생각을 완전히 쉴 때부터 시작되느니라"고만 답하셨다. 그리고는 어서 방을 나가라는 듯이 손을 문 쪽을 가리키시는 것이었다. 질문이 너무 유치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던 나는 더이상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겁에 질려서 조실스님 앞에서 물러나고말았다.
먼 훗날에야 나는 조살스님의 말뜻을 짐직할 수 있게 되었다. 고승이 되려고 하는 건 속세인들의 야망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재물, 명예, 사랑 등을 얻으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궁극의 성취는 없다.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새로운 목표가 다시 나타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영의정이 한자리에 앉아서 속에 있는 마지막 소원을 숨김없이 말해보는 놀이를 한 옛날이야기가 전해진다.
영의정이 먼저 말했다.
"위로는 오직 상감마마 한 분뿐이고 아래로 만백성을 거느리고 있지만, 임금님의 자리에 한번 앉아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입니다."
왕비가 말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지만, 저도 상감마마가 상궁을 거느리듯이 다른 남자들을 거느려보았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왕이 말했다.
"온 나라와 백성이 다 내 것이지만 그래도 무엇이든지 가져다 주는 사람이 좋더라."
사람이 위를 향해서 구하다보면 끝없는 긴장에 피곤하게 될 수밖에 없다. 궁극의 안식처는 어떤 높은 성취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현재 상정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 바로 여기의 평범하고 좀 불편하다 싶은 곳에서 쉼터를 찾지 못하면 영원히 휴식처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구하는 것이 기껏해야 하인이 아닌 주인자리, 그것도 하인이 좀더 많은 주인자리가 되겠는데, 그는 하인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주인이므로, 그 주인은 하인의 하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반복적인 주기가 있다고 한다. 우주에는 '성주괴공成住塊空' 즉 생겼다 없어지는 주기, 사람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주기, 그리고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移滅' 즉 일어났다가 바뀌어 없어지는 주기가 있다는 것이다.
조실스님이 말한 '쉼'을 저 주기의 법칙에 활용할 때 참다운 사랑이 생긴다. 미움이 폭발하려고 할 때 그것을 쉬면 그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게 되고, 분노가 치밀 때 마음을 쉬면 그 분노가 연민으로 변하게 되고, 분노가 치밀 때 마음을 쉬면 그 분노가 연민으로 바뀐다. 속스러움과 성스러움, 악과 선, 거짓과 참다움, 추함과 아름다움도 끝없는 주기로 반복된다.
어떤 이는 사랑으로만 가득 차 있고, 다른 이는 분노와 증오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주기에 쉬고 또 활동하느냐에 따라 부정적이나 긍정적이냐가 달라질 뿐이다. 지하 카바레에 불을 지르거나 훔친 차로 여의도광장을 폭주함으로써,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는 많은 사람을 살상한 이들에게만 분노가 있지 않다. 병들어 죽어가는 경찰관 아버지에게 자신의 콩팥 하나를 줌으로써 아버지를 살린 그 아들에게만 사랑이 있지 않다. 분노의 화신과 사랑의 화신 사이에는, 마음을 쉬어야 할 때에 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쉼은 밝음이 아니요 어둠이요, 지식이 아니고 무식의 지혜다. 어둠은 상대가 편하게 취하는 표정이나 몸가짐을 바꾸지 않아도 되게 하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처럼 남의 눈을 부시게 하지 않는다. 무식의 지혜는, 인간이 아는 것은 인간이 모르는 것의 억천만분의 일도 못 됨을 깨닫게 한다. 겸손한 현자를 만든다. 무한의 맥박을 느끼게 한다. 상대를 특출한 지식으로 위하려고 하면서 피곤하게 만들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상대를 편하게 해준다. 쉼은 편안함을 만들고, 편안함을 주는 것 외에 더 좋은 사랑은 없다.
마음의 쉼은 낙오자가 됨을 뜻하지 않는다. 대학입시나 각종 고시를 앞둔 수험생이 공부하는 일을 팽개치고 놀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수험생들을 괴롭히고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은 시험 그 자체나 공부의 어려움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긴장감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이 위에 올라설 수 없다'는 야욕에 찬 정복심이다.
마음을 쉬는 사람은 공부하지 않으면 죽어야 할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억지로 공부하지 않고, 시험결과에 상관없이 공부하는 그 자체나 어려움을 이기는 그 과정을 좋아한다. 터득하기 어려운 것을 익하는 일을 좋아할 사람이 있으랴마는 그 난관의극복을 즐거움의 하나로 삼은 이의 예는 한없이 많다.
마음을 쉰 사람은 투쟁으로 공부나 일을 하지 않고 기쁨으로 한다. 남에 대한 사랑은 억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조금도 변형되지 않은 채로 남에게는 사랑이 될 수가 있다. 정복과 봉사는 양면적인 것이어서 정복심의 주기를 쉬어버리면 뒤따라오는 것은 봉사심뿐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 쉼을 '집착이 없는 정열의 사랑'이라고 한다. 금강경에서는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 세상이 한바탕 봄꿈이요 한마당 무대이므로 집착할 것이 없지만, 봄꿈의 무대에서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랑의 극을 연출해내라는 말이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이 다 같이 '자기버림'을 전제한다. "어떻게 하면 나를 지우고 버려서 상대에게 줄까"를 생각하지 않고, "상대에게 내가 받는 것은 얼마나 되나"를 계산하고 궁리하는 사람은 감동적인 사랑을 연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조실스님은 사랑의 문제가 대상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완전히 쉬는 데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줌이 아닌 구걸로 사랑하려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만나는 것은 피로와 공허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내용은 쉼의 사랑이다. 쉬어야 하는 이유, 쉬는 방법, 그리고 쉼과 사랑의 관계를 알리는 것이 불경의 전부다. 불경의 부피가 많은 것은 사람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다양한 설명과 주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찌 불경만 그렇겠는가. 모든 종교의 경전에 담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쉼과 사랑이고 나머지는 그 해석일 뿐이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아침저녁뿐만이 아니라
대낮에도
청량한 매미소리가 적막한 산사에서 정열스럽게 울려 넘칩니다.
처서가 지나면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데
도심에서 듣던 매미소리와는 현저한 차이가 있어
여기저기 나뭇가지 사이를 눈으로 열심히 스캔해 보지만
도저히 매미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코로나 19 재난 방역 때문에
'짧고 굵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자는 말이 자주 회자되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지만 실효성이 얼마나 될는지 안타깝기만합니다.
매미처럼 짧고 굵게 살다가 다음생으로 건너가는 것도 꽤 즐겁고 유익할 것만 같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매미의 오덕ㅡ
입추가 지나면 매미는 더 정열적으로 울어댑니다.
빨리 짝을 만나 이승에서의 사랑을 나누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미는 땅 속에서 7년을 기다렸다가 성충이 되어,
이 세상에 나와서 10여일 정도로 살다 생(生)을 마친다고 합니다.
짧고 굵은 매미의 삶을 옛날 선비들은 군자의 다섯가지 덕을 겸비하는 것으로 여겼답니다.
문 청 렴 검 신 (文 淸 廉 儉 信)
1. 매미의 곧게 뻗은 입이 갓끈과 같아서 학문(學問)에 뜻을 둔 선비와 같다.
2. 깨끗한 이슬과 수액만 먹고 사니 청렴(淸廉)하다는 것이다.
3. 사람들이 힘들게 지은 곡식을 해치니 염치(廉恥)가 있다.
4. 집을 짓지 않으니 욕심이 없이 검소(儉素)하다.
5. 죽을 때를 알고 스스로 지키니 신의(信義)가 있다.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그때그때 무아를극복해야불법이된다. 나는없다는것 .신구의 삼업으로 청정한 보리도를 걸림없는 고요선정의 길로나가자 ! 나무아미타불 여래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 .. 매미울음소리 녹음하여 가끔들으면 어떨가요? 더위에 몸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보살님!~
매미 소리는 언제 들어 봐도 즐겁습니다.
더위에 지쳤는지 지금은 조용하네요.ㅎ
나이가 들으니 여기저기 아픈 데가 늘고 있지요.
부디 건강관리 잘해서
우리 허공장회 여행순례 또 다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귀한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ㅇㄷ님의 댓글
ㅇㄷ 작성일
도의 힘은 참으로 묘해서, 그 깊은 뜻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조실스님이 말한 '쉼'을 저 주기의 법칙에 활용할 때 참다운 사랑이 생긴다.
감사한 말씀 세기도록 하겠습니다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ㅇㄷ님!~
어려운
도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소중한 댓글
깊이 감사 감사합니다.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