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안면암 일기 : <삼승(三乘)이란?> 2021년 6월 24일 (음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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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4,310회 작성일 21-06-24 07:40본문
삼승(三乘) (성문, 연각, 보살)
<석지명 큰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불교 교리>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중생들의 성품과 능력에 따라 셋으로 나눈 것이다.
<법화경>에 따르면
성문승은 사정제 , 팔정도 등을 닦아 열반을 증득하는 길이며,
연각승은 십이연기를 관하여 일체법의 인연을 잘 아는 길이며,
보살승은 육바라밀을 닦아 깨달음을 구하는 길이라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하나이며 방편으로 삼승을 설한 것이라고 곁들이고 있다.

11. 노모품(老耄品)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에 많은 사람이 모여 법을 들었다. 그 때에 멀리서 바라문 일곱 사람이 왔다. 늙어서 머리는 희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부처님께 여쭈었다.
"우리는 먼 데 있는 사람으로서 거룩한 이름을 들은 지 오래입니다만, 여러 사정에 걸려 진작 찾아뵙지 못하다가 이제 존안(尊顔)을 뵙게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감로의 법을 드리워 모든 고통을 멸하게 하소서."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한방에서 같이 묵게 했다. 그런데 이들은 방에 있으면서도 세상 일을 생각해서, 떠들다 웃다가 함부로 덤벼, 그 목숨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듯하였다.
그 때 부처님이 일어나 그 방으로 가서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은 모두 다섯 가지 일을 믿는다. 젊음, 단정(端正), 세력, 재주, 귀족. 그런데 그대들은 지금 무엇을 믿고 이렇게 떠드는가?"
이내 게송(146)을 설하시니, 그들은 그 뜻을 깨닫고 부처님 앞에서 도를 얻었다.
ㅡ 출요경, 무상품
146.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쉼이 없이 타고 있나니,
너희는 어둠 속에 덮여 있구나.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느냐!
보일 듯 잡힐 듯 허덕거리며
골목길 돌아돌아 따라온 그림자
어느 모를 어둠 속에 사라져 버렸나니,
내 이 찬 거리에 엉거주춤 섰을밖에. . . . .



소유, 생존, 감상
서울 인근에 만평이 넘는 금싸라기 땅을 소유한 노부부가 있다. 땅값을 계산하면 적게 잡아도 수백억 원이 되리라고 한다. 그러한 부잣집의 할머니가 지금도 시장의 한 모퉁이에 앉아서, 매일 떨이하는 소량의 채소를 팔고 있다. 저 할머니는 돈 쓸 일이 없다. 외식은 거의 없고, 복장도 아주 허름하다. 윷놀이 등의 마을 행사의 기부 요청에 응하는 일은 없다.
처음에 나는 저 노부부의 검박함을 인색함으로 풀이하고, 저들을 어리석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생의 마감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끊임없이 돈을 모으기만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더 문제인 것 같다. "가진 것은 남김없이 쓰고 간다"는 생각 자체가 더 소유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누군가에게 주게 되어 있다. 물건을 구입하든, 일을 시키든, 인심을 쓰든, 가진 것을 내주어야 하고, 죽어서는 저절로 흩어지게 또는 없어지게 되어 있다. 더 많은 음식이 내 뱃속을 통과하게 하고, 더 멋진 옷이 내 몸을 스치게 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것으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명예로 나를 멋지게 포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나를 좋게 생각토록 하는 겉포장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삶의 참된 가치 또는 의미를 소유에서가 아니라면, 삶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할 텐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삶은 행동이다. 멈춤조차도 하나의 행동에 속한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고, 도움이나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회, 국가, 인류를 위해서 큰 공헌을 하는 것도 훌륭한 행동이다. 그러나 저것들은 형식적이다. 내적으로 나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을 '감상鑑賞' 또는 '음미吟味'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미국에서 서양 종교를 공부할 때, 신심이 장한 한 대보살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었다. 그분은 유능한 화주보살이다. 지금은 98세가 되어서 로스엔젤레스의 한 양로병원에 누워 있다. 대소변을 가릴 수 없고, 자손마저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보지 못하면, 감상하고 음미하지 못하면, 그 인생은 답답하다. 저 노보살은 늙어서 그렇다 치고, 우리는 내 주변을 제대로 알아보고 그들의 움직임, 수행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연기를 제대로 감상하는가.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멍청히 스쳐 보내지는 않는가. 바로 내 곁에 있는 가족 친지들도 , 느끼든 말든,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깨닫지 못하더라도 어떤 신호를 주고받는다. 멀고 가까운 이들의 생생한 삶의 연기를 제대로 감상한다면, 우리는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슬프고 괴로운 감동이나 즐겁고 기쁜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단 주의할 관점이 있다. 첫째, 한 배우가 있다고 할 때 그가 왕의 역을 맡든, 거지 역을 맡든, 에스트라가 되든지, 연기만 잘하면 된다. 안소니 퀸이 <그리스의 대부>에서는 '데오 토마시스'라는 대부호 역을 맡았고, 그는 신사복이 아니라 냄새나는 거지 옷을 입고도 더 깊고 진한 감동을 주고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둘째, 우리가 배우가 아니라고 해서, 좋은 배역을 맡지 못했다고 억울해하지 말라. 배우는 피곤하다. 관객이 훨씬 더 좋다. 또 배우들도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와 똑같이 관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 우리는 똑같이 관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시시한 역이라도 멋지게 소화해내는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고, 동시에 관객이 될 수 있다.
가지고 싶으면 맘껏 챙겨라. 그러나 벽에 부딪치면 삶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주변 삶의 모든 움직임을 배우들의 연기처럼 유심히 관찰하고 감상하면서, 묘한 삶의 맛을 즐길 수 있다. 설사 고단하더라도 평화로울 수 있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우리나라 불교는
오랜 옛날부터 대승불교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자님들은
위대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대로
육바라밀을 닦아 해탈 열반의 길로 들어서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부처님과 같은 인격을 갖추어야 성불이다.. 몸과 뜻을 나타나지않는것이 참선이다 마음은 멸정에서 욕계색계 무색계 모는위를 나타내지않는것이 참선. .일상생활어디서나 해야된다 . 안과 밖이 자유자재할때 선이라한다.자기감정을 통제할줄알아야한다섭율 섭선법계섭중생계 많은사람에게이익을준다 인격성이다 충동성 강한 의욕과 의지에 표현이 있어야 된다.자주성 과 창 조성 탐구성 호기심 이 참선 . 마음은 개방성 열여진마음이있어야부드러운마음 유연하는 융통성이있어야한다.. 관찰 이해 발상력을 일으킨다. 당당하게 절에다니는것을 자랑해야한다. 법이귀중한것을알고 공부삽시다. 해탈은 자유자재하며 불사선 이라한다. 감사합니다 소유생존 감상., 큰스님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감사 드립니다 . 얼마나다행한일인가요. 우리들의 인연이 .! 나무아미타불 .
ybr님의 댓글
ybr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 보살, 원만행 보살님!~
성불을 뜻 확실히 알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라고 덕담을 자주 하는데 부처님과 같은 인격을 갖추라는 뜻이었군요,
어떻게 중생들이 감히 . . . . . .
큰스님의 글은 정말이지 읽으면 읽을 수록 심오하면서 도력과 법력에 감화를 받게 됩니다.
죄송합니다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가 아니고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가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 큰스님과
신도님들과의 인연 아마도 몇 천생이 되겠지요??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