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안면암 일기} < 하늘 향한 지장대원탑 > 2021년 6월 7일 월 (음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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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3,935회 작성일 21-06-07 09:26본문
청
120
선의 열매가 익기 전에는
착한 사람도 화를 만난다.
선의 열매가 익은 때에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어떤 단순하고 일정한 법칙 밑에서 행해진다면,
결국 그것은 어떤 의미 없는 동일한 사실이 되고 말 것이다.
시간에 의한 관습적 무감각이라는 사실로.
121
그것은 재앙이 없을 것이라 해서
조그마한 악이라고 가벼이 여기지 말라.
한 방울 물은 비록 작아도 듣고 들어서 큰 병을 채우나니,
이 세상의 그 큰 죄악도
작은 악이 쌓여서 이룬 것이다.
"조그마한 악이라 하여 그것을 행하지 말라." ㅡ 공자


허공의 공
(대품반야경 5)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다 가지는 허공
가졌다는 생각도 없으므로 잃을 것도 없는 저 허공이 부럽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대품반야경>의 여기저기를 산책하는 중이다. 공사상을 허공의 비유에 의해서 살펴보자.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을 허공의 비어 있는 상태, 또는 아무것도 없는 청정한 상태에 비유하고 있다. 반야바라밀은 바로 공의 완성이므로 공을 허공에 비유한다. <반야경>의 공사상과 허공의 특징 가운데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은 허공의 비유를 많이 쓰고 있다. 공사상을 말할 때도 허공의 비유를 쓰지만 마음을 나타낼 때도 허공의 비유를 쓴다. 불자들이 허공의 비유를 쓰지 않더라도 허공은 좋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다 가지는 허공, 가졌다는 생각도 없으므로 잃을 것도 없는 저 허공이 부럽지 않은가?
먼저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수보리야, 허공이 청정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이 청정하느니라. 허공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 않는 까닭에 청정하느니라. 반야바라밀도 마찬가지이다. 허공은 취할 수 없는 까닭에 청정하고 반야바라밀도 마찬가지로 청정하느니라. 허공은 붙잡을 수 없고 모양이 없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까닭에 청정하느니라. 반야바라밀고 허공과 마찬가지로 청정하느니라.
허공의 청정한 특징은 반야바라밀의 특징이라고 한다. 즉 완성된 공의 지혜로 볼 때,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완정히 비어서 아무것도 없고 그래서 그 허공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볼 수 있다.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 완전히 집착을 쉴 때 사물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앞의 모양도 보이고 뒤의 모양도 보인다. 술도 보이고 술이 변해 버린 식초도 보인다. 우유도 보이고 우유가 변해진 요쿠르트도 보인다. 완정히 비어서 붙잡을 것도 모양도 없다. 특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무한한 모양으로 변화할 수 있다. 모양이 없으면서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양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어서, 항상 비어 있고 항상 차 있다. 공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이와 같은 공의 지혜를 체득하고 공의 지혜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공사상의 전문가인 용수보살이 저술했다고 하는 <석마하연론(釋摩하衍論)>에는 허공에서 열 가지 특징을 끌어내고 있다.
천태종에 입문해서 뒤에 선종의 대가가 된 영명연수선사도 그의 저술인 <종경록(宗鏡錄)에서 허공의 열가지 비유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면 용수보살이 말하는 허공의 열 가자 뜻을 살펴보자.
첫째로는 걸림이 없다는 무장애의 뜻이 있다. 허공은 이 형상의 세계에서 장애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무런 걸림이 없다. 형상을 가진 우리의 몸은 걸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걸림이 없이 쓸 수 있다. 공의 정신으로 모든 집착을 지워낸 반야바라밀을 닦고 성취할 수 있다면 우리는 걸림이 없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곳에 있다는 주편(周遍)의 뜻이 있다. 허공은 이 세상 어느곳이나 이르지 않음이 없이 두루 있다. 정신이나 물질을 막론하고 멀고 가까움, 크고 작음, 밝고 어두움에 상관없이 허공은 어느곳에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가치의 기능을 다 발휘하지도 못하고 그 아름다움을 다 음미하지도 못하고 살고 있다. 정의에 집착한 사랑, 평등에 집착한 사람, 제도개혁에 집착한 사람, 의식개혁에 집착한 사람, 불평불만에 집착한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넓은 바다 가운데 편협한 부분만을 보고 작은 것만을 누리고 있다. 공의 지혜를 닦는 것은 어둠이나 밝음이나 선이나 악이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악조차도 하나의 예술이 된다.
셋째는 평등하다는 뜻이 있다. 허공은 아무런 친소와 차별이 없이 평등하다. 깨끗함과 더러움, 귀함과 천함, 선악과 악, 진실과 거짓, 범부와 성인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 완성된 공의 지혜에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각기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편협되게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므로 어느 것이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넷째는 광대하다는 뜻이 있다. 허공은 광대해서 조밥함이 없다. 안이나 밖이 없이 전체이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전체이므로 끊어지고 갈라짐이 없다. 그래서 허공은 영원하다. 끝남이 없다. 반야바라밀로 보니, 모든 인연이 항상 나에게 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지, 어떤 처지로 갈라져 있어도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만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다섯째로 형상이 없다는 무상(無相)의 뜻이 있다. 허공은 형상이 끊어졌다. 공간적 형상도 시간적. 심리적 모양도 없다.
여섯째는 청정하다는 뜻이 있다. 허공은 청정해서 더러움이 없다. 허공에 아무런 붙을 것이 없으므로 쌓일 것도 없고 따라서 깨끗하다.
일곱째는 변할 것이없다는 부동(不動)의 뜻이 있다. 허공은 변할 것이 없어서 이루어짐과 부서짐이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불생불멸이다. 반야바라밀을 닦아서 공의 지혜로 세상을 살면 형상이나 추함이나 흔들임이 없다. 허공의 마음은 그것들을 모두 감싸 버린다. 튀어나오는 모양을 그대로 보아 둔다. 빈 마음은 무조건 있는 모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여덟째는 한량이 없고 여유가 있다는 유공(有空)의 뜻이 있다. 허공은 한량이 없다. 무한한 여유가 있다. 답답하지 않다. 헤아릴 수가 없고 무한하다. 반야바라밀의 마음, 공을 실천하는 지혜의 마음은 풍족하면서도 넘칠 것도 없다. 끊임없이 비우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아무것에도 의지함이 없고 심지어 허공 자체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공공(空空)의 뜻이 있다. 허공은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있다. 의지해서 신세질 것이 없으므로 보답해야 할 것도 없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부모. 형제자매. 부부. 친지. 사업상의 동업자. 고객 등 모두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도움 받는 일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도움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도움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의무적인 신세가 아니기 때문에 의무적인 보답이 필요 없다. 스스로 좋아서 도우면 된다. 그 도움이 주고받을지언정 기뻐서 주고 기뻐서 받는 것이다. 그래서 얽매임이 없다. 반야바라밀의 공은 이래서 좋다.
열째는 자유롭고 걸림이 없다는 무득(無得)의 뜻이 있다. 허공은 집착할 것이 없으므로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자유롭다. 아무런 얻을 것도 없고 얻고자 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대자유이다. 해방이다. 반야바라밀은 이 해방, 이 해탈, 이 자유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사스님들의 허공에 비유한 가르침도 하나 들어 보자.
마음은 허공과 같으니 ,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느니라. 모든 허공계가 본래 나의 일심체이니라. 허공을 여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법신은 허공이요, 허공은 법신이니 이 둘은 다르지 않느니라. 천지는 허공을 통하여 덕을 베풀고, 사람은 빈 마음을 통하여 덕을 베푸니, 참선은 마음의 허공을 알리며, 마음의 허공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치느니라.
또 있다.
그대들은 허공이 되라. 허공은 비움으로써 삼라만유를 소유하나니 큰 사람이 되려면 마음이 허공과 같아야 하느니라.
마음의 허공을 성취하는 반야바라밀, 너무도 멋있고 귀하고 시원한 것이다. 이 허공의 마음들이 있는 곳이라면 삼악고(三惡道)라고 하더라도 살 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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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청량한 아침 햇살을 받아 빛을 발하는
<지장대원탑>의 위용이 하늘을 향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탑 안의 대원본존 지장보살님 점안식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대원본존 지장보살님께서는
큰스님과
설정스님
신도님들을 무척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저희들은
대원본존 지장보살님을 몹시 경배드리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코로나 19 재난이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현재 진행형이어서 답답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저희 불자들은
여법한 지장대원탑 점안식의
시절 인연이 다가올 때까지
자기 자리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불심을 키우도록 하겠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무수한관계속에서 서로의지합니다. 서산스님께서 금강산에가셨는데 금강산아래모두작은돌 큰돌이 모두여래다 .우주 의비밀 진실을 깨달음을얻있다. 미후와 번뇌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나무 물소리도 못듣고 속된즐거움 참된즐거움 , 내생각이바뀌면 보이는것이다라져 미혹 무지를 허망한것이 사라지고 진실락이온다. 이것이깨달음이다 , 보살이 정득할 수기심정 ..! 불토,?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언제나하늘이 맑습니다. 쓰다듬어야한다 여유를구불구불 유속을 막아흐르니 그대로뜷고나온다, 자연은 곡선이다 . 자연스러운 묘미를 알아야 희망을보며 삶에기슬. 지혜시간을즐기는 영혼을사는사람이다., 망고와 진락? !,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생기발랄 큰보살, 원만행보살님!~
서산대사님께서
금강산 아래 작은 돌 큰 돌이 모두 여래다.
무명 중생 금시초문입니다.
큰보살님 덕분에 무지가 약간 벗겨졌으니 즐겁습니다.
자연은 곡선이다.
이 또한 큰 가르침이네요.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