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안면암 일기} ㅡ < 어린이 날을 축하하려고 용심(勇心)을 다해 얼굴 내미는 매실(梅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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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5건 조회 7,746회 작성일 21-05-05 07:25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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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이나 전단(향나무 이름)의 좋은 향기도
바람을 거슬러선 피우지 못하지만
덕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도,
모든 방위에 두루 피운다.
꼭 집어 낼 만한 단점은 발견할 수 없으면서, 어딘가 사귀기가 거북한 사람이 있다.
또한 이렇다 할 장점을 발견할 수 없으면서, 어딘다 남의 마음을 온통 앗아가는 사람이 있다.
인격의 조화성, 즉 인격의 향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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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이나 '다갈라'(향 이름)'
청련화 '발사길(향나무 이름)'
아무리 그 향기 좋다 해도
계(戒)의 향기만 못하다.
가장 친절한 교사도 자기 자신뿐이다.
가장 진실한 교재(敎材)도 자기 자신뿐이다.
가장 정밀한 교안(校案)도 자기 자신뿐이다.


석가보살의 용맹심 ( 2 )
(본생경 1)
용맹정진의 마음으로 궁극의 깨침의 위해서
달려들지 않으면 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가 우리의 형편없는 기백을 구경하게 될 것이다.
이어서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신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야기의 끝을 맺기 위해서 수행시절의 전생과 현재를 관련지어 설명하셨다.
"그때 국왕은 지금의 아난이었다. 그때의 용감한 기사는 사리불이었고, 보살명마는 바로 지금의 나였느니라."
보살의 전생이야기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 명, 즉 보살명마, 용감한 기사, 국왕은 부처님 설법시의 중요한 인물 세 명과 관련된다.
이 <본생경>의 이야기에서 석가보살이 화신으로 몸을 받은 명마는 용맹정진력을 투철하게 실천한다. 한 왕국을 일곱 나라의 왕이 침략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명마인 석가보살이 전광석화와 같이 달려가서 왕을 잡아오곤 한다.
말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힘찬 인상, 즉 용맹심을 보여주는데 번갯불처럼 달려가서 적국의 왕을 채어 가지고 돌아오는 구도 또한 용맹심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이야기 중에서 용맹심의 극치는 여섯 번째 왕을 잡아 들이면서 석가보살인 명마가 부상을 입고 숨을 몰아쉬며 누워서 눈을 껌벅이며 생각하는 장면이다. 다른 말이 나서가지고는 일곱 번째의 왕을 칠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용감한 기사만 죽게 되고 결과적으로 바라나국의 왕도 항복하게 된다는 것을 그려본 후 ,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용맹심을 발휘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에 왕에게 하는 말도 또한 인상적이다. 일곱 나라 왕에게 전쟁을 다시는 일으키지 않겠다고 다짐은 받아 두되 죽이지는 말고 살려 보내라는 것이다. 보시와 덕을 베풀라고 한다. 그리고는 석가보살인 명마가 죽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 이야기에서 전쟁을 치루기는 하지만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이 표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침략해 오는 군대를 쳐부수었다는 표현만 사용될 뿐, 누구의 목을 쳐서 흘리게 했다는 말은 볼 수가 없다. 일곱 명의 왕들도 어린아이를 안아 오듯이 데려왔다가는 전쟁이 끝난 후에 다시 돌려보낸다. 살생을 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흔적이 엿보인다.
여기서 유일하게 목숨을 버리는 것은 용맹정진을 닦는 석가보살 자신뿐이다. 부처님은 이 전생이야기를 마치고 명마는 자신이요, 바라나국의 왕은 아난존자요, 용감한 기사는 사리불존자라고 과거생과 금생을 연결시킨다.
이 본생담에서 석가보살인 명마는 용맹정진의 수행정신을 확실하게 실천했다. 인간의 머릿속에는 진리와 바로 통신되고 우주의 기와 연결되는 슬기가 쌓이지 않고 사소한 정보들만 쓰레기처럼 쌓여 나약해지고 용맹심이 없어진다.
우리가 일반주택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면 짐이 너무도 많드는 것을 알게 된다. 열심히 모은 것들이 전부 버릴 것이 된다. 그것들이 필요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사할 때나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위기를 당했을 때 우리가 돌파력이 없고 무기력한 것은 진리의 힘, 우주의 기운을 받지는 아니하고 그것들과는 상관없는 사소한 정보들만 모아왔기 때문이다. 그 정보들은 인간을 용맹정진하게 만들기는커녕 인간을 패배주의자. 회색주의자. 기회주의자. 도피주의로 만든다. 도를 얻는 불도공부를 할 때,'용맹스럽게 매달리면 마침내 성취된다.'는 생각으로 불법의 핵심에 대해서는 좀처럼 파보러 생각하지 않는다. 도를 닦는 어려운 고비를 만나면 그것을 회피할 궁리만 한다.
팔정도에서 용맹정진은 계정혜 삼학의 기본은 이룬다. 저 석가보살 명마처럼 전쟁에 나가서 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각오와 그와 같은 용맹정진의 마음으로 궁극의 깨침을 위해서 달려들지 않으면 우리가 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가 우리의 형편없는 기백을 구경하게 될 것이다.
마치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이 졸게 되면 사람이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텔레비전이 사람의 얼굴을 보듯이 말이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가령 사람이 백 년을 살거나 그 이상을 산다 할지라도 친족들을 떠나 이 세상의 생명을 버리게 되리라.
불법은 100년 미만을 살 수 있는 우리의 목숨을 200년이나 300년으로 늘리려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여야 할 죽음을 연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짜내야 할 고름이 살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타 종교에서는 육신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불교에서도 부활과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선종의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가섭존자가 열반에 든 부처님의 관 앞에 나타나자 관 속의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이심전심(以心傳心)을 말하기 위해서이지 부처님이 육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둠으로써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이 육신의 목숨을 길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목숨을 지움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목숨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것과 느끼지 않는 것을 같이 만듦으로써 세상의 전체 목숨과 나의 목숨을 같은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이 방송을 듣는다고 할 때, 한국 사람은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외국 사람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외국인이 한국말을 모른다고 해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다. 외국인은 한국인의 통역에 의해서 알아들을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인간의 의식이나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경우, 인간의 말을 쓰는 사람만 목숨으로써 가치가 있다. 인간의 말을 쓰지는 않지만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목숨으로써 가치가 있다. 인간의 말을 쓰지는 않지만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목숨으로써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쓰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통역해 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되거니와 인간의 통역이 없이도 그대로 존재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제한된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있음과 없음, 죽음과 죽지 않음 같은 식으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고는 죽음과 죽지 않음, 있음과 없음의 제한된 사고를 벗어나는 것이다.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전혀 걸림없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경지가 있다. 그 경지가 바로 열반이고 해탈이다. 그 경지의 터득이 깨달음이다. 우리는 그 경지를 얻고자 한다. 그 경지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 외지인, 또는 산하대지일 수도 있다.그러나 외국인이나 산하대지라고 해서 존재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가치 기준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로 측정할 수가 없다. 단지 죽음과 삶을 통합함으로써 죽음을 벗어나는 사람을 말이 다른 외국인이나 사고방식이 다른 별나라에서 온 외지인으로 비유해서 각기 나름대로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뿐이다.
100년이나 500년으로 목숨을 연장하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생각을 크게 바꾸어서 내가 산이나 들이나 바람이나 바위 등으로 되고 다른 이가 인간의 목숨과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감상한다고 하더라도 주관. 객관이 완전히 바뀐 그 상황을 나의 목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죽음을 지운 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번뇌와 공포의 화살을 뽑아버리고 거리낌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초월하여 근심없는 자, 평안에 돌아간 자가 될 것이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오늘은
아흔아홉 번째 5월 5일 <어린이 날>입니다.
미래의 꿈과 희망인 <어린이 날>을
축하하기 위해
사군자인 매화가 어느새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너무 작고 여리지만,
설봉스님의 예리하신 안목 덕분에
싱그런 모습을 멀리 앉아서 감상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무럭무럭 잘 자라서
사회와 인류의 동량이 되듯,
매실도 안면암 청량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무르익어
실한 열매를 맺으면
귀한 음식의 재료가 되고
언제 어디에서나 축하주가 될 것입니다.
오늘따라 날씨가 한층 더 화창하고,
<초파일 오색 연등>과 철쭉 영산홍이 유달리 뛰어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정광월 합장님의 댓글
정광월 합장 작성일
덕의 향기는 만리 간다고
비온 뒤라 깨끗하지요
새벽부터 청계사 갔다
과천 안면암 포교당 참배 할까 생각만하다
동네 등나무 밑
모든 어린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허허 지명 대종사님
어버이날도 가까이 오고
스승의 날 도
건강하셔요
감사드립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가네
고맙습니다
정광월 두 손 모음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다정다감하시고 총명하신 정광월 보살님!~
덕의 향기는 만리간다고 합니다.
불법을 닦는
수행자의 #계향 #정향 #해탈향은 얼마나 멀리까지 전달될까요?
언젠가 본 적 있는
보살님 동네의 멋진 등나무 그늘에서
법구경 한 자락 읽는 호강을 그려 봅니다.
등나무의 보랏빛 꽃
저도 내년에는 눈호강할 수 있으려는지. . .
올해의 스승의 날에도
석지명 큰스님을 찾아 뵙지 못해 대단히 죄송하고 면목없습니다.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불연생사 불애생사 죽음을두렵고 무서워하지만 자아관이 넓은 불보살의 생사? ! 공덕을자꾸지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동일체선행이 수행이다. 인류가치중 자유다. 생명이다 공기와가따 행복이다 자유의가치가최고다. 법치주의 공정과자유 민주주의 본인들의인권 시장주의 서로교환하는 자유경제 위대한스승 부처님 ! 의 가르침 ! 은산철벽을넘어선 삼매 ? 말길과 생각이끈어진 자리 금강으로 된울타리를 뜰어야한다. 그자리를비유하건데 눈이땅에 떨어지면안된다. ..하늘은 푸르고 아름다운 꽃들은 웃으며 어서오십시요 . 큰스님조금전 출발하셨읍니다. 그고깊은 수행 국보. 문화재의 수준급의 공덕이 서해의 관음도량으로 우뚝 세워지고있읍에 지금이순간 모리숙여 합장공경 하옵니다..나무 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 ..건강과 자연과 불연의 가피 하옵소서.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원만행을 적극 실천하시는 큰보살님!~
큰스님께서 서해의 관음성지 도량
우리들 안면암으로 출발하신 소식을 알려 주셨습니다.
첫 새벽부터 밤까지
용맹정진하시면서 소중한 틈을 이용하여
포교당 소식 빠르게 전해 주심에 깊이 감사 감사드립니다.
유수같은 세월이 흐르면,
안면암 전각들이
저절로 수준급 문화재가 되고,
언젠가는 국보로 영원히 자리잡을 것을 합장배례하며 기원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