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안면암 일기} ㅡ < 초록의 색상으로 > 2021년 5월 3일 月 (음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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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5건 조회 8,612회 작성일 21-05-03 08:22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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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잘못을 보지 말고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 보지 말고,
오직 항상 자기를 돌보아,
법에 맞나 안 맞나를 살펴보고자.
그것은 도리어 자신을 허물하는 것이라 하여, 남의 자기에 대한 나무람을 비웃는다.
"네게도 그런 허물이 있지 않느냐?" 하며, 도리어 반항하고 꾸짖는다.
개 앞에서도 고요히 머리를 숙여라. 네 허물은 언제나 네 허물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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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예쁜 꽃이
빛깔만 고와 향기가 없듯,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말도
행하지 않으면 결과가 없나니.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원리는 어디까지나 원리인 것뿐이다.
그것이 직접 실행에로 응용되어, 일상 생활의 용광로에서 시련되기까지는,
우리의 인격에 대한 그의 가치는 매소부(賣笑婦)의 머릿기름과 분(粉)에 불과할 것이다.


사람은 얼마나 살는지 아무도 모른다.
고뇌로 엉켜있다. 태어난 것은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기약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원시 불교나 대승불교의 복잡한 교리를 이해하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의 원음에 가장 가까운 것을 읽으면서 부처님의 인간적인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아울러 불교교리의 방향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번에는 죽음을 주제로 다룬 부분을 읽어 보자. <숫타니파타>의 <대품> 중에 있는 이 경의 제목은 화살이지만 부처님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명은 정해 있지 않아 얼마나 살는지 아무도 모른다. 애처롭고 짧아 고뇌로 엉켜 있다. 태어난 것은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기약하고 있다. 익은 과일은 빨리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와 같이 태어난 자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이도, 장년도, 어리석은 이도 , 지혜로운 이도 모두 죽음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죽음에 붙잡혀 저 세상으로 가지만 아비도 그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친척도 그 친척을 구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이 있다.
부처님은 인간이 꼭 죽어야 할 처지에 있다는 것과 인간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출가한 동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죽음의 해결이었다. 인간들이 종교를 가지는 것이나 우리가 불교교리를 공부하는 것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죽음을 바로 맞아들이려는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절을 찾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불교를 믿으려는 이유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분의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너무도 죽음을 무서워해서 안타깝기도 하고 추하게까지 느꼈다는 것이다. 불교에는 분명히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맞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가르쳐 주리라는 기대에서 불교를 찾았다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필자는 직접 본 적도 있다. 불법공부를 잘하던 노보살님이 있었다. 그분은 불법을 철저하게 닦고 싶은 생각에서 육식은 물론 파. 마늘까지도 먹지 않았다. 열심히 수행하다가 어느 날 죽음에 가까워졌음을 느꼈는지 아들과 딸들을 불러놓고
'나는 내일 사시에 떠날 것이나 그런 줄 알아라."고 유언을 남겼다. 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를 사시라고 한다.
다음날 사시에 그 노보살님이 쓰러졌다. 자손들은 노보살님을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온갖 약을 써서 돌아가시지 못하게 하기는 했지만 의식만 있을 뿐, 몸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손들 보고
'죽게 내버려 두지 병원에 와서 이 고생을 하게 하느냐."고 나무랐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서 그 노보살님든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의사들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매달리며 육식이 몸을 건강하게 만들 것으로 생각했는지 고기음식을 먹으려고 했다. 그 노보살님은 병석에 누운 지 2년 후에 돌아가셨다. 자손들은 자신의 어머님이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송광사의 방장으로 계시던 구산(九山)큰스님께서 열반(涅槃)에 들기 전에 유언을 남기셨다. 그 유언 중의 하나는 의외의 것이었다.
" 내 육신에서 온기와 숨기가 떠나려고 할 때 절대고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말아라."
구산 큰스님은 앉아서 열반에 드셨다.
또 한 가지 감동적인 죽음의 모습은 오대산 상원사에 계시던 한암 큰스님의 열반장면이다.
큰스님께서는 법상에 앉아서 법문을 하다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말씀을 멈추셨다, 법상에 앉아서 입정(入定) 중에 열반에 드셨다. 기자가 앉아서 열반에 드신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그 사진을 지금도 볼 수가 있다.
숫타니파타 >에서 부처님은 젊은이나 늙은이나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나 다 같이 죽을 날짜를 받아놓고 있다고 말한다.
두려움 중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다고 한다. 그 두려움은 인간이면 누구나가 필연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이다. 불법의 모든 교리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여의는 공부이다.
사성제는 죽음의 현실과 죽음의 원인과 죽음을 여읜 열반과 죽음에 여의는 길을 설명하려고 한다.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은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십이인연은 죽음이 오는 도리와 죽음을 여의는 도리를 동시에 설명하고 있다.
공사상(空思想)은 목숨을 지움으로써 죽음을 지우고 성구사상(性具思想)은 목숨과 죽음을 한꺼번에 삶의 전체 모습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선종에서는 대사(大死) 즉 큰 죽음을 가르친다.
이 목숨은 크게 죽여 버림으로써 크게 살리려고 하는 시도이다. 큰 죽음 뒤에만 큰 의심이 나오고 큰 의심이 나온 뒤에야 큰 깨달음이 있을 수 있다.













부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가령 사람이 백 년을 살거나 그 이상을 산다 할지라도 친족들을 떠나 이 세상의 생명을 버리게 되리라.
불법은 100년 미만을 살 수 있는 우리의 목숨을 200년이나 300년으로 늘리려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여야 할 죽음을 연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짜내야 할 고름이 살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타 종교에서는 육신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불교에서도 부활과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선종의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가섭존자가 열반에 든 부처님의 관 앞에 나타나자 관 속의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이심전심(以心傳心)을 말하기 위해서이지 부처님이 육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둠으로써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이 육신의 목숨을 길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목숨을 지움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목숨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것과 느끼지 않는 것을 같이 만듦으로써 세상의 전체 목숨과 나의 목숨을 같은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한국 사람과 외국 사람이 방송을 듣는다고 할 때, 한국 사람은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외국 사람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외국인이 한국말을 모른다고 해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분명히 사람이다. 외국인은 한국인의 통역에 의해서 알아들을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인간의 의식이나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경우, 인간의 말을 쓰는 사람만 목숨으로써 가치가 있다. 인간의 말을 쓰지는 않지만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목숨으로써 가치가 있다. 인간의 말을 쓰지는 않지만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목숨으로써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쓰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통역해 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되거니와 인간의 통역이 없이도 그대로 존재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는 길은 제한된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있음과 없음, 죽음과 죽지 않음 같은 식으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고는 죽음과 죽지 않음, 있음과 없음의 제한된 사고를 벗어나는 것이다.
죽음과 삶, 있음과 없음이 전혀 걸림없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경지가 있다. 그 경지가 바로 열반이고 해탈이다. 그 경지의 터득이 깨달음이다. 우리는 그 경지를 얻고자 한다. 그 경지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외국인, 외지인, 또는 산하대지일 수도 있다.그러나 외국인이나 산하대지라고 해서 존재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가치 기준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로 측정할 수가 없다. 단지 죽음과 삶을 통합함으로써 죽음을 벗어나는 사람을 말이 다른 외국인이나 사고방식이 다른 별나라에서 온 외지인으로 비유해서 각기 나름대로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뿐이다.
100년이나 500년으로 목숨을 연장하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생각을 크게 바꾸어서 내가 산이나 들이나 바람이나 바위 등으로 되고 다른 이가 인간의 목숨과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감상한다고 하더라도 주관. 객관이 완전히 바뀐 그 상황을 나의 목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죽음을 지운 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번뇌와 공포의 화살을 뽑아버리고 거리낌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초월하여 근심없는 자, 평안에 돌아간 자가 될 것이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이틀 후면 5월 5일 어린이날입니다.
햇님과 바람과 비 덕택으로
겨자씨만하던 어린 연두색 잎사귀들이 점점 자라더니
어느새 시시각각 초록의 색상으로 완전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초록은 자연계에서 인간의 마음을 가장 안정시켜 주는 색상이라고 합니다.
정설에 의하면
학교 주변에 초록의 풀과 나무가 많을 수록
자라나는 학생들의 인성과 건강과 성적에 무척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안면암의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수천,수만 그루 건강한 나무들의 초록빛 색상이
장엄한
전각(殿閣)들과 조화를 이루며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우리들 심신을 포근히 어루만져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도
결국에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점점 영구 소멸되어 질 것입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안면암 파란하늘만 보면 가슴이 펴지면 내얼굴잔주름이 없어져요. 보아라! 놓아라 깨친다. 쓸데없는생각마라 걱정없게..삼천대천세계ㅣ가내집이다,가는곳마다나의고향이다.깊은세계들어가 부처닝 의길을간다?이말은 경허 선사님말씀 , 시간이없어서 주방 오늘 천도제준비 도우러갑니다 ..할 수상행식 즉 생각을 다음에....나무아미타불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원만행을 적극 실천하시는 큰보살님!~
맞습니다.
안면암 파란 하늘만 보면 가슴이 펴지고 나아가 얼굴의 잔주름이 펴질 것같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사
경허대선사님 가르침 언젠가는 열심히 공부해 보고 싶네요.
천도재 준비 ㅡ
도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봉사하시는 보살님들 모두모두 정중히 감사드립니다.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ㅇㄷ님의 댓글
ㅇㄷ 작성일안면~~~~암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ㅇㄷ님!~
단 세 글자입니다만
그 깊은 속내를 조금은 알 것같습니다.
만사형통하십시오.
감사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