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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주: 아버지의 생환과 리인수 인민군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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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게시대행 댓글 9건 조회 30,000회 작성일 20-07-0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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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전쟁 감회


새로운 희망을 안고 맞이한 2020년도 반이나 지나갔다.

이 소중한 세월 속에 중국 우한시에서 나타나서 거침없이 처들어온 역병 covid19는

지난 반년 동안 전쟁만큼이나 아픈 상처를 남기며

끝을 기약할 수 없는 큰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휴전 상태로 굳어져버린

6.25 전쟁의 상흔(傷痕)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올해가 6.25 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여서 범정부 차원의 각종 기념행사가 열렸다

전쟁을 겪은 세대인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국가적 큰 행사에서 울린

군가(軍歌) 몇 곡이었다.



텔레비젼 보급도 변변찮은 시절, 길가 라디오 방에서 확성기를 행길 쪽으로 향하게 고정시켜 놓고 종일토록 들려주어서 굳이 배우려 하지 않아도 귀에 익었던 군가들이 어느결에 일체 들리지 않게 되었었다. 해마다 6.25를 기념하는 행사마다 의례히 합창하곤 했던 군가들인데 어느 진보 정부에서 금지곡으로 묶어서였다고 후일에 알게 되었었다.



금년 들어 정부 행사에서 이 군가들이 울려퍼져서 마치 사라져간 군인들이 다시 살아난 듯 

그 의미가 매우 크게 다가왔다.

결코 전쟁을 미화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이 이 군가들을 들으면

6.25 전쟁의 비극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전쟁의 참화를 피하고 평화를 지키려하게 될 것이라 기대하게도 하였다.



지난 25일, 6.25 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에서 <영웅에게> 라는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우리 장병들과 UN군의 유해 등 147위가 태극기와 UN 깃발에 쌓여 환국하는

엄숙한 자리였다.

여기서 문재인 대통령이 "6.25의 노래"를 함께 합창하였다.

그간 문 대통령이 북한을 향해 유화적 태도를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노동당 제1부 부장 김여정이 평화의 상징처럼 겨레가 희망을 걸고 있는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를 6월 16일 한 낮, 일거에 폭파하여 우리는 제대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울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임 대통령들이 금지곡으로 묶어버렸던 이 군가를 문재인 대통령이 합창한 사실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 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이 "6.25의 노래"는 전쟁을 일으킨 세력에 대한 분노와 평화를 기원하는 간절함과 나라를

지켜내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3절까지 이어진다.



<영웅에게>라는 행사에서 되살아난 군가는 또 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물리치고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이 "전우야 잘 자라"는 산화한 군인에 대한 동지들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 4절까지 이어진다.

중학교 2학년 때 6.25를 만난 우리는 교련시간에 이 군가에 발맞추어 행군하곤 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늙은 군인의 노래>가 나왔는데, 이 군가도 위 행사에서 불리었다.



나는 행사 중계 방송을 시청하던 중 눈물을 흘리며 행사 참석자들을 따라 이 군가를 함께 불렀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었을 바라느냐

나 죽어서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위 군가는 돈을 벌지 못하고 가난하게 사는 군인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라는 노랫말 등으로 3절까지 이어져 있고, 그 노랫말만으로도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참전 군인의 부모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군가들을 부르며 숱하게 눈물을

뿌렸을 것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과거를 망각한 민족에겐 평화도 미래도 없다는 賢者의 말이 있으니 두고 두고 음미해볼만한 군가들이다.



전쟁이 어디 국가적 변고일 뿐이겠는가. 나 개인에게도 이에 못지않은 아픔들이 많이 있었다.

추억이라 하기엔 너무도 끔찍하고, 회상이라 하기엔 너무도 생생한 사건들이다.

온 가족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건은 시집 간 작은 언니의 실종이었다.

피난민을 싣고 가던 트럭이 폭격을 맞고 산비탈 언덕에 굴렀었다는데,

거기에 탔던 사위가 혼자 살아돌아와서 아내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갑자기 눈이 멀었고, 40여일이 지나서야 겨우 시력을 회복하셨다. 나는 언니의 실종보다

어머니의 실명에 더 크게 상심했었다.



인민군의 노역자로 끌려 가신 아버지의 기적 같은 생환(生還)은 감동 그 자체였다.

태백산맥 끝자락 영양에 초겨울이 다가오는 무렵이었다. 경주 안강까지 기세를 올리며

내닫던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인민군은 옷이며 신발이며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성한 군인은 부상자를 하나씩 둘러메고 걷고 있었다. 군수물자를 싣고 가던 트럭이 고장 났다.

고장이 아니라 연료가 다해서 서버린 것이다. 왜 하필 그 차가 거기서 서버렸는지. 어깨에 꾀 높아 보이는 계급장을 단 장교가 마을을 뒤지며 남자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생이신 아버지는 그 무렵 44세 아니면 45세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들은 나의 아버지를 강제로 끌어내 갔다. 그 장교는 다른 무리들이 구해온 지게에 뭔가를 잔뜩 얹어놓고 아버지에게 지고 가라 명령한다. 평생 지게를 저 본 일이 없었던 아버지는 일어서지 못하고 비뚤거리셨다. 나와 동생들이 길길이 뛰면서 울어댔으나

소용없었고, 아버지는 사력을 다해 일어서서 걸어가셨다.

다음 날 새벽, 국군이 마을 앞 신작로를 따라 북진하고 있었다. 그 대열은 한나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붙잡혀 간 지게부대는 봉화 깊은 산골로 길을 잡고 퇴각하는 인민군 부대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제보가 있었는지 미군 제트기 여러 대가 교대로 날아와서 사정없이 기관총 사격을 가하였다.



행렬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아버지는 재빨리 바위틈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지셨다. 잘못 움직이면 미처 죽지 못한 인민군의 총에 맞을 염려가 있어서 아버지는 이틀 동안이나 그 시체더미에서 숨을 죽이고 계셨다 한다. 살아서 주위의 눈길을 피해가며 마을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 피비린내 나는 옷을 입은 체로 마을에 들어설 수가 없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은밀히 옷을 갖다 달라는 전갈을 보내셨다. 나는 어머니가 싸주신 아버지 옷을 들고 지시 받은 대로 당나무거리로 아버지 마중을 갔다. 저만치서 걸어오시는 아버지를 발견한 나는 옷 보따리를 길가에 내던지고 "아부지이!" 외마디 소리치며 달려가서 아버지를 얼싸안았다.



전쟁이 한창인 여름에, 인민군들이 우리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집안을 뒤져서 익힌 음식은 먹고 쌀이며 된장 등을 다 퍼서 나갔다. 한참 지나서 인민군 둘이서 들어왔다. 말쑥한 장교복 차림으로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다리를 절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그의 수발을 드는 특무장이었다. 그 부관이 예의 바르게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감추어두었던 쌀을 꺼내서 밥을 지어 행낭채로 내가셨다. 그들은 매우 고마워하였다. 그리고, 야전 병원이 뒤따라 올 테니 그 때까지 머물게 해 달라고 했다. 그 장교는 다리 상처뿐만 아니라 코피를 자주 흘렸다. 요즘처럼 화장지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코피 흘릴 때마다 난감해 했다. 나는 어머니 몰래 이불 귀퉁이를 가위로 잘라서 목화솜을 빼내어 갖다 주었다. 그 장교는 나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그는 군복을 입었지만 귀공자 모습이었다. 우리 둘은 마치 친구처럼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고 그가 김일성대학 출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왜 싸워야하는지" 의문을 던지며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어린아이 수준에 맞게 설명해주기도 했었다.



어느 날 후퇴하는 인민군 지프차가 지나가면서 그 장교를 차에 태워가게 되었다.

그 장교는 자기 이름은 <리인수-李仁秀>라 하고, 자기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써주면서 전쟁 끝나거던

평양으로 놀러오라 했다. 어린 마음에 뭔가 영 이별을 앞둔 양 슬픔 같은 것을 느꼈었다.



리인수 대위는 살아서 자기 고향에 돌아갔을까?

나는 나이 들면서 그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던 그의 인생관과 역사관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리인수 대위가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믿고 있다.



남북이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하고 통일이 되면 우리는 진정한 강대국의 대열에 오를 것이다.

우리 국민은 부지런하고 정이 많고 우수한 두뇌를 갖인 민족이니까 !


2020. 07. 04.  오 선 주

댓글목록

소양자님의 댓글

소양자 작성일

정말이예요??  문대통령께서 6,25가 북한소행임을 인정하고 노래까지 했다구요?? 다행입니다. 역사를 바로 알고 참회도 하고 칭찬도 정확히 해야하겠지요?? 외국에 사는 저희들은 고국의 행복한 소식이 최고 행복합니다. 더위와 코로나에 조심하시길 빌며... 독일의 자연심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애국자 자연심 보살님!
고국의 좋은 소식이 많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6.25가 북한 소행임을 인정> 하셨는지는 직접 말씀이 없으셨기에
내 개인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북한에 대해 우리 체제를 강요할  생각은 없고
서로 협력 관계부터 만들어가자고 말씀하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
6.25의 노래가 울릴 때 함께 합창하신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원하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으니까요.

건강하세요.  오선주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존경하는 오선주 보살님!~

저는 1953년에 태어났으므로 전쟁의 참혹상을 전혀 모르고 자랐습니다.

딸의 갑작스런 변고에 충격을 받으신 어머니께서 40여일 실명하셨다는 비극에
가슴아팠습니다.
그리운 아버지의 생환 시 옷가지 보따리를 던져 버리고 "아부지이~" 외치며 얼싸안으셨다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열흘 전 TV  6.25 기념식 장면은 잠깐 스치고 지냈기 때문에
이 지극정성의 글의 읽는 내내
죄송스런 마음이 밀려 왔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완전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군가의 내용이 전부 기억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불교방송 BTN <드라마 붓다>를  자주 시청했습니다.
2600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출가 전에도 전쟁을 거부하시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노력하시는
대자대비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리인수 인민군 대위와
오선주 보살님의 며칠 간의 일화는
단편소설처럼 아름답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엄마 몰래 이불 귀퉁이를 튿어 솜을 뻬어다가
리인수 대위의 코피를 막아 줄 생각을 하시다니 . . .

<空과 인연법>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 어린 총명한 어린이가
조상님들의 은덕과
불보살님들의 가피로  잘 자라
사회인이 되어 여러 방면으로 훌륭한 대가가 되셨고,
안면암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셨습니다.

리인수 대위님의 뒷소식이 무척이나 궁금해졌습니다.

저같이 아무 것도 모르는 백면서생에게도
그런 엘리트들의 생존이 북한 실정에서 가능했었는지 다소 의문이 됩니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신 참전 용사님들의 거룩한 희생과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  덕분에
현재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 11대 부국으로 발전했음을 다시한번 배웠습니다.

지금도 살아 생전에
우리나라의 통일을 오매불망 기다리시는
100살에 가까우신  분들의 간절한 소망과 염원이 꼭 이뤄지기를 기원드립니다.


이 사바세계에서
전쟁이 없는 세상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까요???


두서없이 횡설수설한 것같아 매우 죄송합니다.
부디 모쪼록
장마와 폭염의 여름철 건강하게 지내시길 비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해탈심 보살님!
마치 나의 마음 속에 들어갔던 듯한 댓글을 올리셨네요.
소상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6.25전쟁 통에 이산 가족이 많고 고아도 많았는데
나는 아버지를 잃지 않고
아버지 사랑을 듬북 받으며 자랄 수 있었던 것을
인생 최대의 행복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리인수 인민군 대위는 
그 당시만해도 아직 남북이 하나의 몸이었던,
즉 남북 동질감에 잠겨 있던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 당시는 그랬으니까요.
남북 적대관계가 형성된 것은 6.25전쟁이후였습니다.
서로 원수라고 매도하고,
학교 교육에서도 북한을 원쑤라고 가르쳤으니까요. 

리인수 인민군 대위는 평양에 있는 자기집에 놀러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지만
그가 살아서 자기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겠는지는 의문입니다.
오늘 갑자기
리인수님의 명복을 빌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이 슬픈 역사는 언제쯤에나 끝이 날까요.
우리가 힘이 없어서 이 전쟁을 하고 있다는
리인수 대위의 말을 오늘도 상기합니다
우리 주변 열강국들의 간섭에서 벗어날 힘을 길러야 한다고 젊은세대를 향하여 외치고 싶습니다.
오선주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우리가 힘이 없어서 이 전쟁을 하고 있다"

어린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리인수 대위님의 절절한 애국심이 어렴풋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오늘 갑자기
리인수님의 명복을 빌어 주시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난다는
보살님 말씀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분의 명복을 함께 빌며
아직도 현재진행 중인
우리 민족의 최대 불행였던  6.25 비극의 잔재가
우리 한반도에서 어서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절실해 집니다.

슬픈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지혜가 생기고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우리나라가 처한 국제적 상황을 직시하고 각성해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기성세대들에게
이념의 갈등을 초월해서 진실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하지 않을까요?

오선주 보살님 글을 읽으면서
정치나 사회  경제 등
세상사 현실을  아무 것도 모른 채
하루하루
숙생의 업장 소멸하느라 애쓰는
해탈심 잠시 깊은 생각을 빠져 봤습니다.             
                                                    해탈심 합장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아아! 숙생의 업장에서 해탈에 길로 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이 사람에게
보살님은 항상 존경의 대상입니다.

며칠 전에
안면암을 떠난 어떤 분이
헤탈심이 누구냐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해탈심이라는 사람이 큰스님과 어떤 사이냐고 궁금해 해서

큰스님께서 동국대 다니실 때 선후배간이셨다고. 그것이 내가 아는 전부라고 말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해서 큰 스님 잘 받드시니 보기 좋습니다. 불국의 복을 받으세요.

ybr님의 댓글

ybr 작성일

저는 50년 전에
조계사에서
큰스님을 뵈었습니다.

선후배 이전에
큰스님의 조계사 신도였습니다.

기고만장하며
무명 속에 헤매던 나이 어린 해탈심에게
개유불성 실유불성을 깨치게 해주신 유일한 스승이십니다.


전생의 빚 갚느라 폭풍연애 끝에
대학을 중퇴하고 크나큰 불효를 하며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학교인 가장생활에서
 무사히 졸업하지 못하고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안면암으로 보내 주신 조어장부 큰스님이십니다.

슬픔에 빠진 저는 가족들과 상의해서
머나먼 고찰을 찾아
무작정 템플 스테이하려고
안면암 포교당의 큰스님을 인사차  뵈었을 때
선뜻  마음을 다스리라고 안면암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설봉스님의 배려와
밀운행보살님 도일심보살님의 따뜻한 시선과 손길 아래서
한 달 가까이 매일매일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제행무상 인생무생을
뼈저리게 느끼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1달의 숙려기간이 끝나고
법원에서 이혼수속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보름 후
난생 처음으로 일본서 성공한 화가인 여고생 친구를 찾아가
열흘 간
일본의 명승지와 문화 등을 여행하고 돌아 왔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약간의 일본어는 할 수 있었으므로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마침 오늘 조금 전 그 고마운 친구와 코로나 19역병 때문에 안부 카톡을 했었지요.

안면암에서의 마음 내려 놓기와
일본여행이 끝나자
저는 생활의 일선으로 꿋꿋하게 나아가
아픈이들을 간호 보호하며
세세생생의 업장들을 조금씩 녹여 내고 있습니다.

사실은 무리해서라도
동국대학교에 복학하고 싶었으나
큰스님께서는 그만하면 많이 배웠다며 위로해 주셨기 때문에
세상의 허망한 욕심을 내려 놓으며 마음을 비워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석지명 스님께
불교의 가장 핵심 사상인
<空과 자비> 배우게 되었으니
오로지
불보살님들의 가피이십니다.

어떤 분이신시는 모르지만
하근기 중생인 해탈심에게 관심을 보여 주셔 매우 감사드립니다.

불보살님들과
석지명 큰스님께 입은 恩德을
빙산의 일각이나마
되갚고 싶어
무지와 무명을 무릅쓰고 서투른 글로
안면암 홈페이지 봉사를 자주 하고 있는 해탈심입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언제나 늘 부족하고 모자란
저의  위에 쓴 댓글을
수정하려 했지만 불가능합니다.

몇 줄 더 보충했는데
노보살님께서 자꾸만 부르시는 바람에
어렵게 공들여 쓴 글들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안면암 홈페이지에
관심과 성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선남선녀님들께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2020년 7월 7일 아침 7시:  존경하는 오선주 보살님!~

어제는 더욱 바빠서 꼭 해드려야 하는 말씀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아아! 숙생의 업장에서 해탈에 길로 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이 사람에게
보살님은 항상 존경의 대상입니다. >

이 표현은 천부당만부당하십니다.
언감생심
존경의 대상이라 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중하고 깊은
<안면암에서의 인연과 불연>은 몇 생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을 것같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