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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주: 매일 10 km 걸어서 통학한 심신 단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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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게시대행 댓글 13건 조회 53,277회 작성일 20-08-0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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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心身) 단련에서 얻은 것들 


요즘 집안에서만 지내니 삶 자체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역병 코로나19 공포에 더하여 무더위와 장마까지 겹쳐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집안에 갇혀 생활한지도 벌서 일곱 달이 넘어간다. <방>이란 말이 있는데 방콬은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집>은 코로나19 펜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에서 크게 영향 받은 결과로 집콕이 더 안전하게 느껴진다. 어쨌거나 집콬하다보니 체중이 늘어만 간다. 아직은 좀 더 활기 있게 살고 싶은 욕망은 있어서 운동을 하려 마음먹어도 좀처럼 실행이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초등 고학년과 중3 합해서 5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왕복 10km를 걸어서 통학했다. 요즘처럼 노면이 잘 다듬어진 길도 아니고 바위산들을 폭파해서 만든 길이어서 모난 돌들이 딩구는 거칠고 험한 길이었다. 그 때는 온 나라가 가난해서 돈 좀 있는 집 아이들이 고무신이나 운동화를 신고 다녔는데 그 외는 거의 맨발이었다. 밥을 제대로 먹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도 드물었다.


초등 5학년의 겨울이었다. 서리가 내렸는데 무서리가 아니고 급강하한 기온 탓에 돌에 맺힌 서리가 칼날 같아서 발바닥에 닿는 느낌은 살을 베이는 것 같이 날카로웠다. 그런 통증과 발 시린 느낌은 얼마 안가서 마비되고 그 다음은 그냥 걷기만 했다. 악조건의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 도저히 맨발로 학교까지 갈 엄두가 안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버지가 벌떡 일어서셨다. 화가 나신 얼굴에 음성까지 높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목표가 있고 의지가 있어야지"로 시작된 꾸중 앞에 나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돌아 나갔다. 아버지 말씀을 수긍할 이해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복받치는 설움만 커서 눈물을 참지 못하고 학교 도착할 때쯤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철이 나서 돌아보니, 그 때 신발을 사 신겨주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시리셨을까? 이런 생각 날 때면 번번이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 때 다져진, 어떤 고행을 이겨내려는 의지는 나의 일생을 통한 정신적 큰 자산이 되었고 신체적으로도 굳건한 체력을 축적해 주고 있었다. 나를 강인하게 길러 주신 아버지께 고맙습니다 말 한 번 못해 드린 것이 지금도 가슴 에이는 한으로 응어리져 있다.


서울 대학교 총장을 지내고 국무총리에 오른 이현재(李賢宰)선생의 회고 인터뷰 기사에 보니 그 분의 어린 시절 통학 사정이 나와 다르지 않았다. 이미 어린 시절의 심신 단련이 나의 큰 자산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이현재 선생의 회고담을 읽으니 눈이 부어오르게 울던 그 서럽던 기억이 오히려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어린 시절의 먼 길 통학은 체력 증강뿐만 아니고 담력(膽力)을 키우는 기회이기도 했었다.

영양 읍내에 있는 학교에 갈 때에 시간과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굽이져 흐르는 강을 두 번 건너는 지름길을 걸었다. 첫 번째 강에는 커다란 돌들로 이어진 징검다리이고, 두 번째 건너는 강에는 두터운 보(洑)가 깊은 소(沼)를 끼고 꽤 길게 놓여 있었다. 그 징검다리와 보 사이에 넓은 공동묘지가 있었다. 운동회라도 있어서 연습이 늦어져서 한밤중이 되어 귀가 할 때에도 그 공동묘지 옆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비 오는 날 밤에는 귀신들이 불꽃놀이 한다는 소문도 들어서 그 옆길을 걸을 때에는 머리끝이 쭈뼛쭈뼛해지고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 같은 착각에 걸어도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여름에 홍수가 나서 징검다리가 물에 잠기거나, 한겨울 영하의 날씨에 돌다리 위에 살얼음이라도 끼는 날엔 강을 건너지 못하고 신작로를 따라 우회하는 길을 걸어야 했다. 높은 절벽을 깎아 만든 길 반대쪽은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어둠이 짙은 그 길을 걸을 때, 부엉새도 울고 온갖 산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서 간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일곤 했었다. 5일 장날에 맞추어 소 떼를 몰고 그 길을 다니는 소 장수들이 산짐승들이 조용하면 큰짐승(호랑이)이 나다니는 증거여서 그들도 긴장한다고 했다. 강물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길에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5년 동안이나 이 길들을 왕복 걷다보니 공동묘지든 호랑이던 겁날 것 없다는 뱃심이 생겨서 어느 결엔가 나는 무서운 것이 없는 당 찬 아이가 되어 있었다. 결석 한 번 없이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된 것은 그럴싸한 <덤>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밤중에 동구 밖까지 마중 나와 주셨던 어머니에게 고마워요 한 마디 못했고,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 힘이 빠지셨을 때에도 다정하게 엄마 사랑해요 라고 말 못해드린 것이 죽어도 못 잊을 슬픔이 되어 한으로 남았다.


6.25 전쟁을 겪은 후, 아버지는 자그마한 금은방을 차리셔서 우리 집은 경제적 안정을 찾았다. 새마을 운동으로 사람들의 잘 살아보려는 의지도 강해지고, 초근목피(草根木皮) 보릿고개를 탈피할 무렵, 우리는 대구로 이사하였고, 아버지가 직장에 나가시면서 우리 집에는 행복이 감돌았다.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오니 통행금지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새벽 4시를 기다려 집을 나가 을지로 입구 국립도서관 지하실에 있는 영어 학원 ELI 에 다녔다. 신촌 하숙방을 나와 아현동 전차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전차를 타고 을지로까지 갔다. 부모님이 힘드시는데 버스비만이라도 아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4년을 걸어 다녔더니 고3 때 겪은 교통사고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나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국 유명산들을 오르는 <百山會-백산회>라는 친목 단체 등산에 우리 내외도 자주 동참했었다.

어느 해 초가을에 태백산맥을 가로지르는 큰 산을 넘었었다. 저만치 산 아래 벼가 누렇게 익은 황금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남편과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서둘지 않고 천천히 내려가는데, 뜻밖의 절벽을 만나 당황하였다. 능선 끝에 난 절벽이어서 붙들고 의지할 나무 가지 하나 없고 내려다만 봐도 현기증이 났다. 고교시절 기계 체조를 한 남편은 어렵지 않게 폴짝 뛰어내리고 나를 처다 보며 기다린다. 지형은 능선 끝자락이라 양쪽에는 깊은 골이 낭떨어지처럼 깎여 나가 폭이 매우 좁은 자리다. 손이 미끄러지면 나는 낭떨어지 아래로 떨어질 것이란 생각에 장갑을 벗었고 등산화도 벗어던졌다. 발에 닿는 감각에 의지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해서였다. 배낭까지 던져놓고 비장한 각오로 내려간다. 위험천만한 순간이다. 높이 2m 정도 되는 절벽을 등에 업은 자세로 손과 발로 절벽 바위를 더듬으며 힘을 안배해가며 조금씩 내려간다. 호홉 조절이 헝클어지면 힘의 균형도 깨질 것 같아서 그야말로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평지로 내려 선 순간 울컥해졌다. 어린 아들을 혼자 남기게 되지 않은 사실에 뜨겁게 감사했다. 이 후, 나는 어지간한 일에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을 체험으로 터득한 것이다.


그 해 산행은 한 겨울이었다. 경북 풍기 쪽에서 소백산을 오른다. 태양은 빛나고 저만치 보이는 능선에서는 바람 부는 대로 흰 눈가루가 하얗게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능선 위 길을 한 시간 정도 걷다가 하산 길로 내려서니 기온이 영하 16도로 떨어져 있었다. 햇살 아래서 받던 온도를 합하면 영하 20 몇 도로 급격히 떨어진 샘이다. 게다가 길에 쌓인 눈이 깊어 무릎까지 푹푹 빠진다. 중앙일보의 베테랑 등산가의 안내가 없었으면 우리는 산에서 길을 잃고 얼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젊은 여기자 하나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까무러쳐버렸다. 그런 낭패를 수습하고 우리는 다시 걸었다.


한 두어 시간 내려오니 자그마한 절이 있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우리들을 맞이했다.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의자를 불 앞에 갖다놓고 나를 앉으라했다. 절에서 내 주신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일어서려는데 내 다리가 펴지지 않는다. 영하 20 몇 도에서 꽁꽁 언 다리에 갑자기 뜨거운 열을 가한 꼴이었다. 경험이 있는 분들이 달려들어 팔 다리를 마사지 해주시는 등등 출발이 한 시간 정도 지연되었다. 피가 도는 생명체일지라도 급격한 체온 변동은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는데 나는 그에 더하여 백문불여일체험(百聞不如一體驗)이란 말을 남기고 싶다.

진실로 힘든 등산 경험들 속에서 나는 진리 같은 지혜를 많이 터득할 수 있었다.


사회*노동정책을 하는 남편은 정치 바람이 불 때 교단에서 쫓겨났다. 주한 미대사관에서 미국 이민을 주선하고 직장까지 마련해 주었지만 우리는 내 조국 땅에 눌러앉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나는 남편을 대신해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은사 李英燮대법원장, 남편과 학문적 유대가 깊은 趙畿濬고려대교수, 李建鎬 모교 이대 법대학장 세 분의 추천장을 받아 응모하고 면접을 거쳐 1981년 3월 청주대학교 교수로 발탁되었다.


내가 강의하는 형법은 <죄와 벌>에 관한 철학적 배경으로 해서 매우 어려운 학문이다. 대법원 영어통역관을 그만 둔 후 전업 주부로 지낸 세월이 길어 새롭게 강의 준비하는 일과 강의하는 그 자체가 쉽지 않았다. 초임인 나에게 주간 9시간, 야간 9시간 도합 열여덟 시간이 맡껴졌다. 가히 살인적이다. 두어 달 지날 무렵에는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쓰러지지 않고 견뎌낸 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르침과 등산하면서 다진 체력 덕택이었을 것이다.


여름 방학에 어머니가 보약을 마련해주셨다. 정작에 당신께서는 평생 약 한 첩 드신 적이 없으셨던 어머니였다. 목이 매인다. 나는 평생토록 어머니의 애물단지였다. 어머니 앞에 불효한 생각이 날 때면 꿈결에서도 흐느껴진다. 용서를 빈다는 것조차 너무도 이기적인 행위이다.


지금에 이르러 나는 자유인이다.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이 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 평생 동안 나를 얽매었던 책임과 의무의 굴레에서 벗어난 홀가분함은 말 그대로 행복이다. 이렇게 자유로운데, 왜 나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지 수시로 의문이 일기도 한다. 타고 난 성격일까, 후천적으로 쌓인 습관 탓일까.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심심해 할 틈이 없다. 생각나는 대로 신변잡기라도 쓰고 싶어지고, 선조들이 남기신 국보급 명화를 보면 모사(模寫)하고 싶어져서 물감 등 화구(畵具) 일체를 새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찾아드는 평정심은 행복으로 이어진다.

자유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살아있는 나의 이 <바지런 함>은 평생을 일에 매달려 열심히 살아온데

대한 보답으로 주어진 습관이라고 믿고 있다


남편의 위패를 속리산 法住寺에 모시면서 나는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동진출가(童眞出家)하시고, 일지기 미국 템풀대학에서 종교학 Ph.D를 취득하시고, 대한 불교조계종 입법기관인 중앙종회 의원 등을 역임하신 고승(高僧) 석지명 대선사께서 나를 거두어주셨다. 석지명 큰스님께서는 능력 있는 후진에게 길을 터 주시기 위해 중앙종회 의원직을 사임하셨는데, 금년 들어 조계종 "원로위원"으로 추천되셨다.


배우자와 사별하고 오랜 교단에서 내려와 두 가지 상실감이 한꺼번에 덮친 내게 釋之鳴큰스님께서는

많은 가르침과 감화를 주셨다. 비록 우둔한 사람이지만 나는 이슬비에 옷 젖듯 불교의 진리에 젖어들었다.

空과 無와 生死不二 사상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깨달으며 20여년을 부처를 닮으려 수행하는 사이

그간 나의 속된 욕심도 마음을 괴롭혀주던 원한도 미움도 멀리 사라져 갔다.


돈오(敦悟)의 경지에 이르는 분들은 전생에 큰 공덕을 쌓으신 보상을 받으시는 결과일 것인데 나처럼 몽매한 사람도 훌륭하신 스승을 만나 오랜 세월을 두고 부처님의 삶을 사모하다보니 어느 결에 내 마음에도 불성(佛性)이 싻트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2020. 08. 04.    吳 宣 妵 

댓글목록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너와 나가 없이 모두 보릿고개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을 이룩한 끈기 있는 민족이 바로 우리입니다.

 비록 배가 고팠지만 그 정신만은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긍지를 갖어도 좋을 민족입니다.

부모 슬하가 인생 제1막이고
내가 책임 지고 가정을 가꾸고 사회에 봉사한 시절이 제2막이라면

불교에 귀의한 세월은 인생 제 3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황혼을 바라보면서 불심을 지니게 된 것이
인생 최대의 행복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오랜 장마에 힘드시고
 행여 물 피해 입으신 도반은 없으신지 
두루두루 부처님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진성 오선주 합장

소양자님의 댓글

소양자 작성일

오선주 대보살님, 저도 어렸을 때 맨발로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어서 실감이 납니다. 저는 유리 깨진 위에서도  Fikier처럼 다치지 않고 걷기도 했습니다. ( 웃음) 지난 일요일에 등산을 할 때 , 다시 한번 맨발로 걷기 시도를 해보았는데 너무 발바닥이 아파서 중도에 신발을 신고 말았습니다. 10여년 전 아푸리카 여행 때 , 원주민들을 보니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맨발로 걷고 살았기에 오히려 신발이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우린  가난하게 살았고 지금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졌지만, 이젠 코로나  바이러스와 홍수로 아직도 힘들게 살고 있으니 , 삶은 역시 괴로움입니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위해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알려주시고,  오온에 취하지말라고 해셨지요? 그런데 무명과 업에 인연해 계속 괴로움을 만들고 살고있네요. 어서 이 가짜 나를 버리고 , 진짜로 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일의 자연심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자연심 큰보살님!
그 고닲았던 시대를 함께 경험하신 분이 계시다니 신기하고 반갑습니다.
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먼져 살은 사람들이
어떻게 경제적 부흥을 일으켰는지 실감 못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들이 너무도 나약한데에 가끔 놀라고 있습니다.
대학 교단에 있을 때에
자살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를 다하여
세상 살아갈 용기로 활용하라고 일갈(一喝)  하곤 했습니다.

서울은 이미 물을 흠뻑 먹었고 한강 수위는 높아지고 있는데
오늘 이후 도 500mm 가 더 내린다고 합니다.
가뭄에 산불까지 겪는 러시아나 호주에도 비를 내려주면 좋은데요.
인간들이 인공 위성을 무분별하게 마구 쏘아올려서
지구 주변에 뜬 구름들이 갈 길을 잃고 헤메는 것 같습니다.

물 폭탄도  코로나도 모두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라봅니다.
우리가 자연을 잘 모셔야함을 모두 깨달아주었으면 합니다.

건강하세요 ^~^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존경하는 오선주 보살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더니
보살님의 정신능력이야말로 숫자의 의미를 초월하셨습니다.

어릴 때  받으셨던
훌륭하신 아버님의 산 교육 덕분에
금생에서 최고의 삶을 누리고 계심이 틀림없습니다.

인욕보살님이셨던 어머님도 마찬가지십니다.

두 분 부모님께서
최고 엘리트이신 보살님을 얼마나 크게  자랑스러워하셨을지 명약관화입니다.

말로만 듣던 보릿고개에
신발커녕 짚신도 못 신었을 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릴 적 거의 극도에 가까운  심신단련은
보살님 인생 최고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사택에 살았기 때문에
경제적 풍요는 없었지만,
등하교의 고생은 전혀 모르고
부모님 그늘에서 마냥 편히 지내왔다는 것을 이 번에 잘 알게 되었습니다.

보살님의 무궁무진하신 능력을
몹시 부러워하며 100세까지 건필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리겠습니다.



저의 <인생 1막>은
환갑 나이에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처럼 빈손으로 결혼생활을 청산한 것에서 끝났습니다.

마침내
<인생2막>은
대자대비하신 불보살님의 가피로
안면암에서
#일체개고 #개시허망 #제행무상을 통렬히 깨치며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아주 작으나마
부처님께,
그리고 주위의 모든 보통 사람들에게 회향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불행히도
우리 사바중생계에서는 아직 코로나 19역병이 현재진행 중입니다.

이곳에 왕림하시는 모든 분들께서
언제나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절절하게 읽는이의 가슴에 닿는 글 잘 읽엇습니다.
나이나 사회적 지위나 성별까지도 부처님세계에서는
모두  허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인생 다 살고 보니
누구의 삶이나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직 젊으시니 보람차고 복된 나날을 즐기며 가꾸세요.
오선주

정광월 합장님의 댓글

정광월 합장 작성일

큰스님
원로  의원 되심
축하드립니다

저는  포교당법당에  축하화분 있길래
큰스님 생신  축하 화분 인줄 알았어요
큰스님
조계종 원로  종회의원 축하 화분이라고...

늦게 알아서 죄송합니다

오교수님의 글은  대단하십니다
어느스님께서 불교티비 녹화장에서
지나간 것은 다 기억 한다고
수필가.시인.대문장가
학자
존경합니다
영어.일어.어학도요

건강하셔 다방면의 숨은 실력  발휘 하시길 바랍니다
불화
민화도요
일요일 가산불교연구원
지관대종사님께  금요일 저녁 같이공부한
중앙승가대  비구니스님과
무견 서원표  비구니  스님
서각 전시회 보며
그스님은 불화 배유 신도님들께  선물하고 싶다고
10년 전부터  미완성
서각 보시더니 하고 싶다고
원표스님은  붓글씨.서각  40년 하셔  도를 이루셔 고희  기념 전시 인사  아트

오교수님께선 독학으로
불화
그 끈기  닮고 싶어요
그스님께 조그마한 단청그림 그려 선물  하시라고  신도들께요

영양  청정지역  맑은곳 어린시절 교스님  살던곳
몇년전 초등동창들과 저는 처음 지나  가 봤어요
소백산 희방사도 생각나네요
대학교 과친구들과 교스님과 간
희방폭포도요 주지스님께서 교수님 친구분
새벽에 법당에 올라간 기억
연화봉 올라가는 길 나리 꽃

김용사도요

교수님
소설가  등단 하셔요

안인숙 보살님 댓글
그  분 소설가  이어요
지명대종사님
불교방송 경전강의 책으로 출판
많은 기여 했어요
오래전 초창기 허공장 대보살님
스님 저서 서문
제일먼저  안인숙  작가님 호명 되어 있어요
설영화.수심화.유마심.한순화운심행  보살 님도요
큰스님께선 노래도
가곡  기다리는 마음
하남석 밤에 떠난 여인
소리새  그대 그리고 나

큰스님
오교수님  건강하셔요
사경도요

      정광월    두  손 모음

정광월 합장님의 댓글

정광월 합장 작성일

큰스님
사진.서예
교수님 불화.민화
합동 전시회 기대됩니다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셔요

    정광월 두 손  모음

석원영님의 댓글

석원영 작성일

조계종 원로  의원
잘못 썼어요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정광월 보살님!~

반갑고 반갑습니다.
저는 날이 갈수록 멍청해지는데
총명하시고 다정다감하신
보살님 댓글 아침에 보게 되니 더욱 기쁘고 즐겁습니다.

어젯밤 늦게
여기 오선주 보살님 글에 댓글 올리다 두 번이나 사라지고 말아 실망했었지요.
서둘다 보니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들 큰스님과
오선주 보살님등에 관한
많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보살님 덕분에 잘 해결되어 정중히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 역병에
장마, 폭염에
부디 우리 모두 항상 늘  건강하기를 비옵니다.
                                                           
                                                    해탈심 합장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정광월 보살님!
애정 어린 댓글 고맙고 감사해요.

심심해서
손녀들에게 남겨주려는 생각으로 쓰는 글이에요.

다만 안면암 홈피를 개점휴업상태로 두면 않될 것 같아서
웃기는 글을 부끄라움 무릅쓰고 올려요.

나를 공포에 질리게 했던
절벽 아래 신작로는
공동묘지였던 자리에
현대식 큰 도로가 건설되어
자연 도태되었답니다.

내가 늙으면서 함께사라져가는 것들이 만습니다

Memo:
아버지의 " 작으마한 금은방"은
625 터지기 전에 가난 탈츨 방편으로
아버지께서 기술을 배워 차린 것.

석원영 드림님의 댓글

석원영 드림 작성일

새벽에 폭우가 쏟아져
댓글 달았어요

비 그쳐 동네 국제선센타  다녀  왔어요
교수님.해탈심보살님
건강하셔요

정광월 합장님의 댓글

정광월 합장 작성일

코로나  백신 개발되어  교수님 딸 계신곳  다녀 오시길 바랍니다
저번에 댓글 달았는데요 날아가 버렸어요
금산사 철야 기도 갔을 때요
저는 새벽 예불  참석
그때 인자하신  성우  주지 끈스님
동국대 이사장님 되셨다고  불교티비에
젊은 시절 금산사 뜰을 거닐 었을
지명  큰스님
같은도반들 다 환속하고
큰스님만
군 입대 때 미륵전서  기도
그뒤 군 면제
새벽에 바라본 금강계단서의 하늘
모악산
큰스님께선  좋은 도량에 계셨어
부러웠어요
하늘만 바라봐도  좋았을...

금산사
원행 총무원장 큰스님
도영 큰스님

스님
건강하셔요
오교수님께서도요
허공장  선배 보살님들요

          정광월  합장

원 만행님의 댓글

원 만행 작성일

공과 무 의  생사  불이      .,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그러고  보니  이진영 교수님 께서  먼저들 어오셔서  지팡  이  짚고 오신  교수님  오셨다고  ....제자의 깊은사랑    ., .검사장 님의    변호사  개업  축하 해주시러  오셔서  수건  까지  챙김 !  뭐가틀 려도    깁이  느꼈읍니다.  그날  목에걸  린  반착거리는  보석 모커리      반지  팔지며    여자의  미  를 갖추신  모습에ㅣ  저는  한번  느꼈읍니다,  교수님  제자들이  다잘되었읍니다  .이제말이지만 제조카딸에 신랑도  헌법재판소  로 그때  발 령받아  지금은 중년  간부지요 .  배 ㅇㅇ  생각 나시나요?    보람을      느끼시지요.  수많은인재를    기르신은혜에 .  또  이렇게 글  로  역사의  삶을    , ,우리들의  교훈 이,  가슴 에 와닿읍니다,,  부디 부디  건강 조심 하시고    또  저는  기대를  해 봅니다.    사랑하는  우리  절의  대모님  !      무진성 보살님  교수님  . 두손  모읍니다.    나무  시방삼세  일체제불  일체 존법  일체보살  일체현성    업드려  예경 하나이다.  원만  행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