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의 안면암 일기] 101. 왜 방일하지 않는 열반이 좋은가(조유품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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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2건 조회 207회 작성일 25-04-16 08:2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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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佛心과 긴장 속의
허공장 총회
사진과 소감문 (1)
고문 시간 생략 일을 많이 한 사람
불심속에서 엄숙히 경청하는 회원들과 긴장 속에서
발표하는 이사님들과 감사님들
밝은 미소의 고운 얼굴들이 내년이면 조금이라도 퇴색하는 것이 아쉬워 가능한 대로 소중한 순간들을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지금이 가장 젊고 고운 시간이랍니다.
저도 작년보다 훨씬 시들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니
내년의 노추(老醜) 생각조차 싫습니다.
너무나 어리석어서
무상無常이 이리도 빨리 실감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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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총회에 동참하시는 독일의 소양자 보살님
소양자 보살님을
희색이 만연한 채 반기시는 조실 큰스님
<상락화 회장님의 총회 선서>
조실 큰스님 분부로
조실 큰스님께
총회 잘 이끌었다고
칭찬 받으시자
안도의 미소를
활짝 지으시는 상락화 회장님
총회가 순조로히
여법하게 마치자 법당을 나가시는 조실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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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왜 방일하지 않는 열반이 좋은가(조유품 3) 3
이에 대한 답은 <열반경>에 이미 분명하게 나와 있다. 법신 · 반야 · 해탈의 삼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삼덕은 해탈의 경계에 있는 특징인데 윤회의 경계에 있는 특징은 혹업고(惑業苦)의 삼도가 된다. 미혹과 악업과 고통이다. 삼덕은 바로 삼도를 뒤집은 것이며 삼덕 가운데 법신은 고통을 바로 본 것이다. 고통을 소멸시키고 법신자리를 새롭게 얻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면 그 고통의 실상이 법신이라는 말이다.
고통의 실상을 바로 보는 일이 해탈수행이고 그 수행으로부터 얻어 지는 것이 반야지혜이다. 수행해서 지혜를 얻을 때 세상이 바로 보이 고 세상을 바로 보면 고통의 세계가 그대로 법신의 세계로 보인다는 것이다. 고통은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중생이 잘못 본 것이다. 법신 자리는 본래 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고통과 법신은 하나인데 중생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법신도 되고 고통도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관계를 그대로 번뇌와 지혜로 옮긴다면 번뇌와 지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는 지혜를 잘못 본 것이고 지혜는 번뇌를 바로 본 것이 된다. 번뇌를 바로 바라보면 바로 수행이 된다. 그렇다면 열반은 끊임없이 사물의 실상을 바로 보는 수행이 된다. 한번 수행해서 지혜를 얻는다고 해서 다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번뇌를 바로 보는 것이 지혜가 되고 일반이 된다는 말이다. 열반을 얻었다고 해서 수행을 중단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죄송합니다만, 내일 또 이어 게시봉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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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
“ 자신을 사랑하듯, 모든 중생을 사랑하라. ”
< 화엄경 >
[ 꽃 / 윤보영 ]
꽃이 피었다
네 미소처럼 피었다. 꽃이 피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내 안을 울리며 피었다
그립게 피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윤병예 합장
원영님의 댓글
원영 작성일
서로가 꽃
나태주
우리는 서로가
꽃이고 기도다
나 없을 때 너
보고 싶었지?
생각 많이 났지?
나 아플 때 너
걱정됐지?
기도하고 싶었지?
그건 나도 그래
우리는 서로가
기도이고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