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불교정화(佛敎淨化)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청담스님과 금오스님을 집중 조명하는 특별기획을 편성한다. 두 선사는 청정승단 구현, 부처님의 정법 실현, 종단 현대화를 통한 자비실천 등 한국 불교에 부여된 역사적 불교적 사명을 수행한 종단 현대사에 가장 걸출한 인물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정화의 기반 위에서 1700여년 불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보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세계적인 종교로 우뚝 설 것이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수좌들이 제대로 공부할 토굴 한 곳 없어 눈치 공부를 해야 할 정도로 낙후하고 어려운 지경이었다.
짧은 시기에 세계 최대의 불교로 성장한 기반이 바로 정화운동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정화도, 본래 한국불교의 정신도 많이 퇴색돼 가야할 길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본지는 한국불교 현대사에서 가장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두 선사의 삶을 통해 한국불교가 진정 추구해야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미래 불교의 앞길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금오당 태전선사 연재를 시작한다. 이 연재는 제5교구본사 법주사와 재단법인 금오선수행연구원, 그리고 불교신문이 공동으로 기획했다. |
오는 10일은 금오선사(金烏禪師)의 입적(入寂) 46주기다. 이날 법주사에는 상좌들을 비롯해 문도들이 모두 모여 선사가 생전에 가르친 공부와 각자 경험한 선사와의 추억을 나눈다. 선사가 불교사에 남긴 발자취는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위대하다. 큰 나무에는 수많은 새가 깃드는 것처럼 스님의 회상(會上)에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배출돼 오늘날 한국불교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
법주사를 비롯 불국사 금산사 등에서 선사의 정신을 잇고 있는 직계 제자는 맏상좌로 대선사로 존경을 받았던 성림당 월산대종사를 비롯해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탄성스님, 혜정스님, 불국사 가람을 일신한 범행스님, 월주스님, 중앙종회의장과 호계원장을 지낸 원로의원 월서스님과 월탄스님, 이두스님, 월성스님, 설조스님 등 종단사에 큰 업적을 남긴 상좌들이 선사의 정신과 공부를 잇고 있다.
금오태전선사 진영
선사의 일평생은 오직 참선공부 하나였다. 일평생을 한결같이 수좌로 살며 조계종이 나아가야할 길을 몸소 보여준 선지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오스님은 한국불교사에서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종단 차원에서 정화를 제대로 조명하고 계승하지 않은데 있다.
종단은 정화를 명분으로 창립되었으며 줄곧 그 목적을 위해 매진해왔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정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더 강했다. 심지어 정화가 그 후 나타난 한국불교 병폐의 원인처럼 낙인찍기까지 했다. 오히려 한발 떨어져 있던 스님들이 더 대우받고 각광받는 전도(顚倒) 현상까지 벌어졌다. 그 때문에 금오스님을 비롯한 주역들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는 금오스님은 수좌들의 공부에 더 중점을 둬 조명을 덜 받았다. 정화운동에 관한 연구는 주로 서울 조계사와 선학원을 중심으로 벌어진 갈등에 주목해왔다. 이는 그러나 정화사의 한 부분이지 전부는 아니다. 비록 비구 대처로 대표되는 스님들 간의 종단 중앙을 둘러싼 권력 개편, 총무원 중앙종회를 통한 각종 법령 정비 및 정부와의 관계, 종단 차원의 각종 정화 정책 등으로 정화운동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스님들이 제대로 수행하는 풍토를 만드는 수단이지 목적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기록이나 언론의 관심이 이 분야에 집중돼 그동안 실제 지방 선원에서 진행된 정화의 본래 목적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금오선사가 정화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망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지금 금오스님을 다시 조명함으로써 우리 정화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돼온 선원 수좌들의 모습을 제대로 복원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를 통해 선원을 중심으로 한 사찰이 어떻게 정화 후 변화해 가는가를 살필 수 있다. 이는 우리 종단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평생 정통수좌의 삶 살며
수많은 제자 양성
정화운동 이끌고
대중중심 禪전통 회복 앞장
‘승가정신 회복’ 과제 놓인
현대 종단의 귀감
정화는 처음 수좌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도량 18곳을 요구하는데서 시작됐다. 경허 이후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최악의 조건에서도 청정불교를 지키며 치열하게 수행했던 수좌들이었지만 일제 시대나 해방 후에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수좌들의 공부 환경만 열악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대화의 물결에 대응해 중생구제의 본래 사명을 다해야하는 사명도 뒷전으로 밀렸다.
가족 부양이 우선인 대처승들은 불교의 두 가지 핵심인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모두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불교정화는 불교의 두 날개, 깨달음과 자비구현이라는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수행하기 위해서 수좌들이 일으킨 운동이었다.
이 과제들은 하나는 종단 중앙을 통해 종단 체제정비 법령 등으로 나타났고 다른 하나는 사찰에서 대중들의 삶과 사찰운영을 통해 구현되는데 금오스님이 사찰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처승 중심의 사찰은 철저히 주지 개인에 초점이 맞춰진다. 반면, 가족이 없는 청정비구승들은 사찰운영은 물론 스님들의 생활까지 모두 대중을 중심에 놓는다. 이 방식이 바로 선불교 발흥과 더불어 나타난 총림(叢林)제도다.
대중이 함께 공부하고 논의하며 공공을 중심에 놓는 원융살림이야말로 정화운동이 만들어 놓은 한국불교의 근본적 변화이며 이 변화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종단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불교는 해방 후 개인 중심의 세속적 사찰운영 방식, 즉 일본식 제도를 따를 것인지 대중이 중심이 되는 출세간적 사찰, 즉 중국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 선종방식을 따를 것인지 기로에서 정화를 통해 후자의 길로 갈 수 있었다.
그 핵심 역할을 수행한 분이 바로 금오선사다. 금오선사는 1955년 종단이 비구승 중심으로 전환되자 곧바로 지방 사찰로 내려가 선원을 개설하고 수좌들을 지도한다. 선사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봉은사 법주사 화엄사 동화사 청계사 등 주요 사찰을 돌며 선원을 개설하고 수좌들을 제접한다. 대중이 중심에 서고 선(禪)이 사찰의 핵심이 되는 총림 전통을 되살린 전법도생의 길이다.
1950년대 후반 종단 정화 후부터 입적 때까지 계속된 이 길은 정확하게 경허선사의 궤적과 같다. 경허선사 역시 견성 후 공부를 했던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보림하다 말년에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김녕사 등 영남지역 사찰을 돌며 선원을 개설하거나 선원에서 후학들을 지도한다.
이를 통해 조선 500년을 거치며 사라질 뻔 했던 전법의 등불은 다시 타오른다. 경허선사가 간신히 밝힌 불씨는 일제에 의해 다시 꺼질 뻔 했지만 금오스님이 다시 전국을 돌며 전통선법을 설파, 활짝 타오른 것이다.
금오선사의 역할이 이처럼 한국불교사에서 크고 광범위했지만 제대로 조명되지 않아 그 활약상과 정신이 계승되지 못하고 있음은 불교 전체적으로 엄청난 손해다. 따라서 금오선사를 이 시대 조명하는 것은 정화불사의 정신을 되살리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밝히는 일이며 운동의 본래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후세에 전하는 막중한 과업이다.
불교신문과 법주사, 금오선수행연구원이 나서 선사의 삶과 가르침을 다시 조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오선사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승가정신을 다시 회복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때 조사들이 본래 이루고자 했던 우리 종단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도 될 것이다.
금오선수행연구원 이사장 월서스님은 “미국의 건국은 청교도 정신이며, 우리나라는 단군의 홍익인간이다. 이처럼 국가나 단체 심지어 세속의 문중까지 그 뿌리와 정신이 있다. 원래 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 발전해나가는 집안이나 국가는 흥하며 그 반대는 망하는 것이 순리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각종 비승가적 행태나 외부의 질타는 모두 우리 종단의 근간인 정화정신을 상실한데서 일어난 것이다. 금오선사께서 어떻게 평생을 수행하셨으며,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이 연재를 통해 사부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며 “그 길이 곧 한국불교가 대중들의 신뢰를 받고 세계인들이 존경하는 승가로 거듭나는 첩경”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