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나큰 마지막 불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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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27,213회 작성일 19-11-10 23:03본문
◎ 크나큰 마지막 불효
# 우리 아버지 팔순 생신 기념 케익 ㅡ 큰 딸이 차려 드린
오매불망 아들바라기하시다 아들 집으로 이사하시는 날의
아버지와 여동생의 석별의 포옹
아들 집에서 곱게 피어난 ♥엄마의 군자란 (25살?)
아버지께서는 연세 팔순이 훨씬 넘으셔 몇 년 동안 콧수염을 기르셨습니다.
16살 때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39세 작고)께서 맹장염으로 갑자기 운명하시는 바람에 증조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 서산에서는 목욕탕이 집안에 있는 유일한 집이었다고 무심히 말씀하신 적 있는데
증조할아버지께서 수염을 늘상 기르고 계셨으므로
노인이 되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신것 같았습니다.
죄송한 일이지만 자손들이 모두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으므로 몇년 후에는 그만 마음을 접고 마셨지요.
장손 집에서 대를 이어 역시 피고 있는 ♥엄마의 군자란
평소 필력(筆力)을 키우시려고 맹물로 연습 중이신 아버지
漢詩, 書藝 독학으로 터득하신 아버지
임종 며칠 전쯤
자손들에게 감사함을 보여 주시기 위해
사력(死力)을 다해 쓰신 것처럼 보입니다.
어제는 석달 전 별세하신 우리 아버지의 양력 생신입니다.
사남매가 며칠 전 음력 첫 생신 날 카톡으로 정다운 추모의 대화를 나눴으므로
오늘은 저 혼자서 여전히 부족하기만한 서투른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 칠십 가까이 살아 오면서 부모님께 크고 작은 불효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 중에서 항상 가슴 속 깊이 박혀 언제든 저를 힘들게 하는 큰 불효가 2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큰 불효는 초등학교 교육자라는 사실이 유일한 긍지였던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은 듯 아프게 하면서 3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말고 대학교를 중퇴한 사건입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우등 장학금을 받고 다니던 대학을 그만 두고
8살 더 많은 예술가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요지부동이니
부모님께서는 친척이나 지인들에게 망신살이 뻗친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속담처럼 결국 아버지께서 피눈물을 감추시고 결혼 승락을 하셨습니다.
어쩌면 전생의 원수였을지도 모르는
철부지 둘째딸은 청운의 꿈과 희망을 가득 안은 채
천재성을 타고 났다고 확신하는 남자 품으로 신이 나서 포르르 가볍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경제적으로 간혹 어려움은 있었지만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결혼생활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딸이 기고만장하며 호언장담하던
보랏빛 성공을 이제나 저제나 하며 1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나마 사회적인 작지 않은 성공이 있었으므로
둘째딸의 희망에 찬 물 한 번 끼얹지 않으신 채
또 20년, 30년이 쏜살같이 흘러 지나갔으며,
다행히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예의바르며 심지(心志)가 무척 깊은 장한 아들과
총명하고 공부 잘하는 딸이 큰 버팀목이 되어 외조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종기가 곪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터지는 법처럼
겉으로 평온해 보이던 저의 가정에 드디어 거대한 폭풍이 몰아쳐
한 달 동안의 유예기간을 거치고
2012년 10월 30일 비로소 법적 수속을 완전히 마쳤습니다.
직장생활로 몹시 바쁜 아들 대신
매사에 통찰력 있고 공정한 딸의 도움 덕분에
저는 가정법원에서나 시청에서 애들 아빠와
눈길 한 번 서로 마주치지 않았고 말 한 번 섞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부모님보다 더 동생들을 극진히 보살펴 주는
우리 지혜로운 언니의 말처럼
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배인 아들과 딸을 선물받고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끝난 38년의 因緣은 이렇게 속절없이 幕을 내렸습니다.
애들 아빠는 가끔 전생의 업연 때문에 자기가 겉잡을 수 없이 화나는 것 같다고 말했었습니다.
그 말에 절대공감하는데
필히 은원(恩怨)을 갚아야 하는 전생의 업장 덕분이었고,
전혀 경제력이나 생활력 사고력 등이 준비 안 된 채
제가 결혼생활에
성급히 뛰어든 금생의 무지와 욕심과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법적인 일은 완전히 끝났으나
경천동지(驚天動地)한 듯 억장이 무너지실 아버지께 이실직고할 일이 너무 큰일입니다.
하지만 사려깊고 우애로운 언니와 여동생의 지혜로
미리 자초지종을 듣게 되신 아버지께서는 거실에 서서 못난 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저는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저절로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린 채
여동생이 시키는 대로 무릎꿇고 앉아
아버지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 .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 .. . "
깊은 심연에서는 어쩐지 불안해 보였으나
평생 두둔만했지 일언반구 불평 한 마디 없었던 딸의 불행 앞에서
아무런 격한 감정의 동요없이 침착하게
몇 마디 하시고는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얼굴에 명이 들지 않아 보이더니 . . . 너무 말랐다.
꼭 일찍 돌아가신 네 외할머니같구나. . . . . . 쉬어라."
(과묵하신 아버지께 직접적으로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은 처음이라 매우 놀랐습니다.
어릴 때 누군가가 관상은 제가 가장 좋지만, 명이 짧을 것 같다며
뒷머리에 제비초리가 있어 단명할지도 모르니
머리카락을 짤라 쌀 속에 넣어 스님들께 시주하라고 해서
두 번 그렇게 했다고 들려 주셨습니다. 세 번 해야는데 기회가 없었는지 두 번밖에 못 했다고
엄마가 아쉽게 말씀하신 적 있었습니다.)
그 후 7년이 지나 석달 전 돌아가실 때까지
서정주 시인의
'이제는 돌아와 국화 옆에 선 누님 '같은
천하 바보 멍청이 둘째딸에게
단 한 번도 두 번의 큰 불효를 구체적으로 꺼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깊은 사랑으로 초연히 세월을 흘려 버리실 뿐.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의 경우
어쩌면 끓어 오르는 분통으로 인하여 홧병이 생기든지 아니면 직접 집으로 찾아가서 . . . . . . . .
두 번째의 크나큰 불효였습니다.
마지막 크나큰 불효입니다.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폭염이 한 풀 꺾여가던 8월 14일 오후 2시 이후입니다.
때맞춰 휴가를 왔던 저는 여동생 부부와 우리 애들과 다섯이서
아버지께 이 생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2개월 동안 해외 출장을 세 번이나 떠난 남동생 대신
아버지께 정성껏 효도를 하고 있는 훨씬 나이 어린 올케는 안타깝게도 예전보다 더욱 수척해져 있었습니다.
멀리서 일하는 저와 사랑하는 외아들이 귀국할 때를 기다리며 사투를 벌리시느라
피골이 상접하신 아버지 모습에
우리들 모두는 저절로 눈물이 솟구쳤지만
애써 아무도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차마 통곡할 수가 없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눈빛만은 형형히 빛나고 계셨습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완전히 곡기를 끊으셔 두유나 요쿠르트 몇 모금으로 연명하신 아버지십니다.
말 한 마디커녕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도록
기력이 철저히 바닥나신 아버지께
마지막의 효도?로
물 한 모금 떠서 수저를 입에 넣어드리려니
간절히 애타게 거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이제는 생명의 끈을 놓아 버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역력해 보이셨지만,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간신히 뜨려고 애쓰시던 눈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셨습니다.
다들 거실에서 조용히 얘기를 나누며 기다리는 사이
엄마 시어머니 그밖의 어르신들의 임종 직전의 모습들을 여러 번 지켜 본 적이 있는 저만 혼자서 먼저
마지막 인사를 간단히 드렸습니다.
아버지 딸로 살 수 있어 대단히 행복했으며 편안히 가시라고. . .
워낙 의식이 명료하신 아버지께서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는 청각을 발휘하시면서 열심히 듣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편히 쉬셔야 한다는 올케의 말에 동감했으니
이제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저희 갈게요."
금세 꺼질 것같은 거친 호흡을 참으시며 애처로히 눈을 감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얼른 머리를 두번 가로 흔드시는 것이었습니다.
몇 초 후 또다시 그렇게 하시는 모습을 뵈니 순간 심장이 철렁하고 가슴이 메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불효를 어찌 해야 하나요?!
금생에서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을 거역해야 하는 이 거대한 불효 앞에 결혼한 딸의 비애가 밀려 왔습니다.
저는 경험적으로
죽음에 가까워진 말을 할 수 없는 노인들이 긍정의 뜻으로 머리를 끄덕이는 것보다
부정의 뜻인 옆으로 머리를 흔드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음날이 <백중기도일>이므로 더 늦기 전에 포교당에 가야 합니다.
20년 이상을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 고운정 미운정 깊은 정이 많이 든 여동생은
혼자서 애쓰는 올케의 고생도 덜어줄 겸
아버지의 임종을 자식들 대표로 조용히 지켜 드리려고 준비하고 갔었으므로
아주 조심스럽게 의중을 떠 봤습니다.
"형님!~ 안 도와 주셔도 돼요. "하며 웃음띤 얼굴로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20년 이상 건강한 아버지와 병든 엄마를 정성껏 모셨던 여동생이
5년 동안 건강하시고 사려깊으신 아버지를 모셨던 올케에게 완전패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희 일행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이별을 하고 돌아올 뻔했으나
올케가 왠일인지 저의 딸에게 외할아버지께 함께 기도를 올리자고 했습니다.
거실에서 문 틈으로 흘러 나오는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의 기도소리를 듣고 있자니
사랑하고 존경하는 외할아버지께 드리는 긴 기도문은
누구나 감동시킬만큼 훌륭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분명히 착하고 총명한 외손녀에게서 큰 위안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덕분에 짙고 깊은 슬픔을 억누르고
그나마 약간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각자 가야 할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천우신조로 외아들이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간신히 귀국하여
아들 며느리 곁에서 평화롭게 운명하신 아버지 장례가 경건히 끝나자마자
여동생이 몇 달 동안 틈틈히 녹음한 아버지와의 통화를 카톡으로 보내줬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 아픈 것은
아버지께 드린 마지막 전화 내용이었습니다.
가벼운 핸드폰을 손에 쥘 기운이 전혀 없으시게 되어
며느리가 들고 있었고,
말 한 마디 전혀 하지 못하시는 아버지께 가슴아파
애타는 목소리로 자꾸만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여동생은 그 때 아버지께서 목소리를 들려 주고 싶어서 얼마나 몸부림치셨을까 하며 몹시
애통해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저는 꺼져가는 생명의 끈을 놓지 못하고 눈도 뜨지 못하신 채 머리를 힘없이 옆으로 흔드시던 아버지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내 자식들아!~ . 날 두고 가지 마! 가지 마! ~~~'
아무리 죽을 힘 다해 목소리를 내려 했으나
단 한 마디도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으셨으니 . . . . .
(22년 전 엄마가 병원에 가시지 않고 집에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온 가족이 밤새 엄마 곁을 지켰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계시는데 그 심정이 오죽하셨을까요??)
자애롭고 지혜로운 우리 아버지께서는 명석하신 머리와 뚜렷한 청각으로
전후상황을 다 분별하고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 곁을 무정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속수무책인 딸들을 용서하시고
이 세상을 편안히 떠나셨을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께서는
저희들을 용서하셨겠지만,
여동생까지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한 저의 무능과 불효를 지금까지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께
생의 마지막 임종 순간까지 크나큰 엄청난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언젠가 오래 전에
아버지께서는 딱 한 번 심각하게 말씀하신 적이 계셨습니다.
" 이 나이 되도록 회한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하지만 다 자란 저희 4남매가 기억하고 있는 한
스스로에게나 가족에게나 타인에게나 한결같이 공정하고 성실근면하신
분이셨습니다.
연세가 드실수록 더욱 언행이 일치하시고
타인에게 모범이 되신 작은 거인(巨人)이셨으며
대인군자(大人君子)셨다고 믿고 싶습니다..
시누이의 간절한 소망을 거부한 올케에게
서운한 감정이 조금 남아 있는 여동생과 달리
저는 아주 서서히 희석되지만 아버지께의 마지막 큰 불효를 용서하는데 시간이 훨씬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마지막 부탁을 올케에게 말 한 마디 내비치지 못한
저의 무능이 너무 가슴 아팠고,
철이 저보다 조금 더 부족한 나이 어린 올케를 마음 속으로 아직 다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딸들과 며느리를 온전히 이해하시고
인간적 감정에서 완전히 해방되시어
가볍게 훨훨 저 세상으로 날아 가셨습니다.
수십 년 전 <TV 명화극장>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전기 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한 언론인이 남편의 엄청난 불륜을 용서한 영부인에게
솔직한 감정을 물으니
"용서했다고 다 잊은 것은 아닙니다." 라고
정색을 하며 냉철하게 대답했었습니다.
설령 지은 죄는 용서했다 해도
인간의 머리 속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는 명백한 진실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사랑 미움 원망 죄 용서 등 인간의 굴레에서
아직도 여전히 해탈하지 못한
범부중생인 해탈심이 헛된 망상에 또다시 젖어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무대자대비 구고구난관세음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여동생이 읽어 주시는 분들께서 식상하실 테니
아버지 얘기는 이제 그만 두라고 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한 소리를 낸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너무 부족한 글이라 시험삼아 올렸다가 내리려 했는데
읽어 주신 분들이 몇 분 계셔 심히 망설여 집니다.
오늘을 넘기고 싶지 않아 욕심을 부렸지만 군더더기가 많아 매우 마음에 걸립니다.
모자란 글에 항상 관심을 베풀어 주시는
선남자님 선여인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소양자님의 댓글
소양자 작성일효녀 심청 해탈심 보살님, 아버지께선 다 용서하시고 아주 좋은곳에 가 계실것입니다. 이제 다 내려 놓으시고 그만 슬퍼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서도 둘쨋 딸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사는것을 원하시고 계실거에요. 앞으로는 모두 다 잘 되고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빕니다. 독일의 자연심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지성과 교양을 겸비하신 소양자 대보살님!~
효녀 심청이라는 허언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더니
나중에는 진심어린 위로에 눈물이 맺힙니다.
한 밤중의 애정어린 댓글에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덕담에 두손 모우며 감사의 예를 올리겠습니다.
저 또한
여기 오시는 선재님들 모두에게 고통과 번뇌가 빨리 벗어지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