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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봉 스님의 안면암 일기 } : 68. 해탈의 특징 1(사상품 17) 전문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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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229회 작성일 24-11-0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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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해탈의 특징 1(사상품 17) 



   자기를 지우고 해탈을 얻은 사람에게서는 다른 사람의 악은 바로 자기의 악이다. 세상의 악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기 때문에 아무리 어리석고 악한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대열반의 특징은 해탈이다. 부처님은 열반을 해탈과 일치시키고 해탈에 대해서 긴 설명을 하신다. 가섭 보살이 부처님께 대열반의 행과 해탈의 뜻을 설명해 줄 것을 부탁한다. 


   부처님은 가섭 보살을 찬탄하면서 해탈의 뜻을 설명하신다. 해탈은 태어남이 없다. 태어나는 것은 음양의 인연이 화합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음양화합이라는 속박이 있다. 육체적인 사랑으로 태어난 것은 다시 그것의 고향인 육체적인 사랑을 구하게 되고 육체적인 사랑을 구하다 보면 그것에 구속을 받게 된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양극 접합점에 있다. 언제나 양극이 인간을 잡아 끌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육체적인 음양의 사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참으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인간 심리의 바닥에는 성적으로 음양의 상대에게 어필하기 위한 점도 많이 작용하고 있다. 또 사람 중에는 이성보다는 동성에게 더 끌리는 이도 있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방법으로 성적인 표현을 하는 이도 있다. 성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육체적인 음양의 화합과 관련지어서 생각한다. 인간은 성잠재 심리를 떠나서는 한 생각도 낼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인간이 음양으로부터 해탈해야 한다고 해서 다겁생래에 걸쳐서 길들여진 육체를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음양의 양극점을 작은 개인에서 큰 우주로 옮기고, 작은 몸의 움직임에서 우주의 동작을 보라고 가르치신다. 개아적인 음양에서 우주적인 음양으로 승화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하튼 해탈의 제1보는 남녀 음양의 화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해탈이 여래이고 허무라고 말씀하신다. 여래는 부처님의 별명이다. '진여의 세계로부터 오신 어른'이라는 뜻이다. 허무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상태를 의미한다. 부처님이 해탈을 여래와 허무로 빗대어 말하는 것은 실체화와 허무화를 동시에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여래는 해탈의 상태를 인격화해서 나타낸 것 이다. 해탈은 그저 속박에서 벗어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구제의 종교성이 있다는 것을 여래라는 인격화를 통해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가 법신으로 항상 있다는 것은 존재와 비존재 또는 있다와 없다를 초월해서 있는 것이다. 만약 해탈의 인격적인 면을 강조해서 여래와 같은 것으로만 설명하면 해탈을 실체화할 염려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시 해탈이 허무와 같다고 말한다. 여래라는 종교적인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빈 상태에 있다는 공사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을 때 우주적으로 꽉 차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해탈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처님은 해탈이 결코 만들어졌다가 깨어지는 옹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해탈은 늙음과 병듦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세월의 구속을 받는다. 세월이 가면 늙고 병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이 만드는 무상으로부터 도망칠 길이 없지만 사람들은 늙음과 병듦을 괴로워한다. 세상의 모든 것, 산하대지와 산천초목 그리고 모든 생물들이 다 늙고 병들고 죽지만 '나'만은 예외가 되고 싶어한다. 이 예외를 바라는 마음은 바로 '나'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다.

 

   해탈은 그러한 집착의 원인 제공자인 '나'라는 감정을 근본적으로 없애 버리기 때문에 늙음과 병듦과 죽음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해탈은 늙고 병드는 것으로부터 벗어 났다고 하는 것이다.

 

   해탈은 또 안정이나 안온에 비유된다.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두려움도 없어진다.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잃을 것이 있고 빼앗길 것이 있을 때 공포가 생기지만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면 공포심이 일어날 수가 없다. 이 안온한 상태에서는 나를 알아주는 동무가 필요하지 않다. 근심이나 기쁨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그저 혼자 스스로 편안할 뿐이다.

 

   해탈에는 순금 같은 보배의 특징이 있다. 물질적으로 무엇인가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구하더라도 더 많이 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가난하게 된다. 또 돈 드는 사업을 벌이려고 하기 때문에 빚쟁이와 같이 된다. 그러나 물질적인 욕심에서 벗어난 사람은 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가난을 모르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만족하기 때문에 항상 보배를 가지고 있는 부자와 같다.


 

   또 해탈한 사람은 다른 생명을 핍박하지 않는다. 육체와 육체에서 나오는 힘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다른 생명을 죽이고 그 시체를 먹으려고 한다. 또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해서 환경을 함부로 취급한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을 지우고 해탈을 얻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으로 한 교만심이 없다. 환경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에 관계치 않고 환경을 보호하고자 한다.

 

   필자는 원주 치악산에 살고 있는 도반 스님에게서 감명을 받은 바 있다. 필자가 치악산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스님의 방에는 벌레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 벌레를 휴지에 싸려고 하니까 도반 스님은 벌레가 답답해 할 것을 걱정해서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스님은 아무리 작은 벌레라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해탈을 얻은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세상에 있는 생명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으려고 할 것이어니와 다른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편안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다.

 

   또 해탈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특징이 있다. 사람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당해서 마음이 동하게 되는 것은 자기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완전히 지워 버리면 기쁜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에 취하거나 기분 나쁜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해탈의 세계에서는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나 특별히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 나를 지운 상태에서는 모두를 다 나로 삼기 때문에 평등하게 모든 사람을 아낀다는 말이다.

 

   해탈은 또 사람을 변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만약 사람이 변화될 수 없다고 한다면 불교에서 극악의 상징인 일천제는 영원히 성불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천제라도 깨끗한 신심을 내기만 하면 그 일천제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고 따라서 불도를 이룰 수가 있다고 한다. 사람이 일천제와 같이 극악인이 되는 원인은 자기라는 감옥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를 지우고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무한히 변화될 수가 있다. 일천제의 마음을 바꾸어서 부처님의 법신에 대한 믿음을 내면 마침내 해탈을 얻을 수가 있다.



   해탈의 특징을 설명하는 가운데 부처님은 분명하게 불교에서 구제 불능이라고 낙인 찍은 일천제마저도 성불할 수 있다고 단언하신다. 《열반경》에는 일천제가 성불할 수 없다고 설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일천제가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열반경》 을 읽는 사람들이 혼란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열반경》은 법신상주와 실유불성 또는 법신상주와 천제성불을 가르치고 있다. 부처님의 몸이 이 세상에 항상 머물고 있고 모든 중생에게 부처가 될 성품이 있다면 당연히 일천제에게도 부처가 될 성품이 있을 것이다.

 

   일천제는 성불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 부분은 일천제가 변화되지 않고는 성불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천제는 발심을 할 수가 없고 좋은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한번 죄를 지은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낙인 찍는 수가 많다.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에서 새 사람이 되어 사회에 나오더라도 사회는 감옥에 간 전력이 있는 사람을 무서워하고 경계한다. 그러나 해탈을 얻은 사람의 마음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껴안고 감쌀 정도로 넓다. 자기를 지우고 해탈을 얻은 사람에게서는 다른 사람의 악은 바로 자기의 악이다. 세상의 악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기 때문에 아무리 어리석고 못나고 악한 사람도 평등하게 사랑할 수가 있다.

 

   해탈은 사람을 참으로 크고 넓고 높고 깊게 만들기 때문에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바닷물을 찻잔 수로 헤아릴 수 없고 허공을 풍선 안에 담을 수 없듯이 해탈을 얻은 사람의 마음 깊이도 짚어 볼 수 없다고 한다.    끝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저는 나이 칠십이 넘도록

무명과

미혹에 사로잡혀

해탈解脫에 대해서  정말로 막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허허虛虛 지명之鳴 대종사大宗師님의

무량 지혜의

법문法門 사리舍利를 읽으며

이제서야 우주의 티끌만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안면암}에

귀의했을 때

조실祖室 큰스님께서 하사하셨던

해탈심解脫心이라는 보살명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당분간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보살명 해탈심으로부터

어느 생에서나 가능할지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자유로울 날을 간절히 학수고대하겠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윤병예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불명이라도 불러야  그덕에  해탈되지요?  해탈심이라고  부르겠읍니다  ..예의바르고  지나친겸손  부지런한  방울  해탈심 입니다  . 커다라신거구미륵 부처님의  불명    축하드립니다 .해탈심보실님  익어가시는듯  진 리에 가을을  만끽하세요  !  사랑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 보살님!

불명이라도 불러야 그 덕에 해탈될 거라는

충심의 말씀 감사합니다만,  저 스스로 해탈심이라고 부르자니 이제는 양심에 몹시 걸리고 있습니다.

애정이 넘치는 소중한 댓글 항상 늘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