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의 안면암 일기 : [ 큰 죽음의 법신法身 ] 24. 본래성불이지만 방편으로 공양을 받음 (순타품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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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202회 작성일 24-03-11 06:57본문
24. 본래성불이지만 방편으로 공양을 받음 (순타품 2) (2)
앞에 보시받은 이는 보시바라밀다와 지혜바라밀다를 구족하지 못하였사오며 오직 육신의 눈만 얻고 부처님의 눈이나 지혜의 눈을 얻지 못하였지마는 나중에 보시받은 이는 보시바라밀다와 지혜바라밀다를 구족하였사오매 부처님의 눈과 지혜의 눈을 구족할 것이거는 어찌하여 두 가지 보시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하시나이까. 세존이시여, 앞에 보시 받은 이는 받아 먹어 배에 들어가 소화되어 수명을 얻고 빛깔을 얻고 힘을 얻고 걸림 없는 변재를 얻을 것이지마는 나중에 보시를 받은 이는 먹는 것도 아니고 소화되는 것도 아니라 다섯 가지 과보가 없을 것이어늘, 어찌하여 두 가지 보시의 과보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하시나이까.
순타의 생각에 정각을 이루기 전의 사람은 아직 번뇌가 다 끊어지지 않고 세상을 여실히 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이고 잡식하면서 사는 무상하고 끝이 있는 몸이다. 또 육바라밀과 지혜의 눈을 구족하지 못했고 음식을 먹으면 그것을 소화해서 수명을 연장하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수준에 있다. 반면에 열반에 들기 전의 부처님은 번뇌가 다하고 일체종지를 이루었으며, 금강과 같은 법신의 몸을 가졌다. 또 육바라밀과 지혜의 눈을 갖추었으며 음식을 먹더라도 먹는 것도 소화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정각을 이루기 전의 사람과 열반에 들기 직전의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어째서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기 전에 올리는 공양과 열반에 들기 전에 올리는 공양이 똑같다고 하느냐고 부처님에게 여쭌다. 즉 정각을 이루기 전의 싯달타는 우리와 같은 범부였고 지금 열반에 들기 직전의 어른은 부처님인데 그 둘은 엄연히 차이가 있을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다.
ㅡ 죄송합니다만, 내일 또 이어 게시봉사하겠습니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
“ 때와 처지를 살필 줄 알고 부귀의 쇠망이 교차함을 알라. ”
< 잡보장경 >
<설악 무산 대종사님의 「행복에 이르는 길」 에세이에서>
「전쟁을 막으려면」
이산가족 상봉 때 어느 신문 독자마당에서 실린 시를 읽은 적이 있는데 정말 가슴 뭉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이산가족’이라는 시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이산가족
언니 모습 날마다
북쪽 하늘에 그려 보며
달밤에 둥근 달에도 그려 보던
50여 년 세월도 강물 따라 흘러가고
언니 이름 부르시고 또 부르시던 어머니는
언니 찾아 이 세상 떠나시고
아버지도 가시고 오빠마저 ···
이런 소식 아는지 모르는지
이 아우의 가슴은 저리고 미어지는 듯
언니 만나면
내 눈물 두 손 모아 오목히 받아
그 고왔던 얼굴 씻어 주고
주름 젖은 얼굴고 고이 펴 주련만
어이해 생사에 못 오면
꿈엔들 꼭 한번 만나기를
새끼 손가락 깨물며
내 머리카락 백발이 되도록
기다릴 이 아우가 두 손 모아 빌면서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담 마? 불교의 진리다 . 모를때 두려움이생긴다 . 모른다 ! 모른다 해도 죽음의 두려움이다 . 안죽고영원히 산다는것 영생을 추구하는것 좋은데가는것 좋은세상가는것 인간의 두려움 왜생기는가 ? 결국 무지때문에생긴다
.깨달음은 모든 무명을 타파했다 . 믿음의종교 탐구의 무명을 타파해서 해탈하는종교 불교는 정말 거룩한 종교임에 두손 모읍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봄이 왔어요.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 보살님!
인간의 두려움은 무지 때문입니다. 그리고 깨달으면 모든 무명은 타파되는 것이니
태양이 떠오르면 모든 어둠은 사라지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소중한 댓글 언제나 항상 감사드립니다.
나무약사여래불
나무약사여래불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