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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강국 독일에 정전이라니.... 독일의 소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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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게시대행 댓글 5건 조회 208회 작성일 25-07-09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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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마냥 서 있던 마인츠역 


작년 9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마인츠역에서 다섯 시간이나 정전이 되어 기차들이 마냥 다 서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우왕좌왕하고, 애를 태우는 모습을 보면서 말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서기 2024년이 맞는지 핸드폰에 찍힌 날짜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세계에서 최강국 중의 하나이고 선진국이라고 믿었던 독일이라는 나라가, 비상 발전기 하나도 준비가 안 되었는지 정말 기가 막혔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고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혹시 돌아가신 심술궂은 시어머님의 장난이 아닐까? 생각하며 화도 나고 웃음이 나왔다.


잠깐 여기서 시어머님 이야기를 해야겠다. 죽으면 다 천당에 갈 텐데…”하며, 묘를 가꾸고 물을 주는 일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남편을, 맛있는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꾀어서 마인츠에 있는 시어머님의 묘에까지 같이 갔다. 15년 전에 93세로 돌아가신 시어머님과 나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나빴다. 시어머님은 우리 결혼도 반대하시고 결혼식에도 오지 않으셨다. 후에 남편이 어머님이 펄 벅(Pearl Buck 1892-1973)의 소설 <<대지>>를 읽으셨는데 중국 사람은 가난하고 더럽고 무식하니 서양인을 꾀어서 밥 배부르게 먹고 운명을 바꾸려고 한다.라고 그 이유를 들었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그리고 중국이 아닌, 한국이 얼마나 잘사는데, 밥을 못 먹어서 당신의 아들을 내가 꼬셨다고? 한마디로 불쾌했다. 그리고 또 만약에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다시 나타나면, 태어난 혼혈아는 유대인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기에 우리 결혼을 반대한다고 하셨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남편과 다투다가 결국 2년 동안 남편만 혼자 어머님을 방문하라고 했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며 일요일마다 혼자 어머님을 방문했다. 법률가인 큰아들도 있었지만, 시어머님은 작은아들인 우리 남편만을 만나기를 원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도 시어머님에게서 점심 초대를 받았다. 나는 일부러 두 번 거절하다가 세 번째 못 이기는 척하고 마인츠의 시어머님 댁으로 따라갔다. 어머님은 정갈하게 독일식 점심을 준비하시고 날 보고 어색하게 웃으셨다. 나는 초대에 감사하다며 식사하고 일부러 설거지도 같이 안 하고 점심 대접만 받고 돌아왔다. 그다음부터는 남편과 함께 시어머님을 방문하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나는 며느리라기보다 그냥 동양 손님이었다.


시어머님은 1920년, 남독의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태어났다. 그분의 어머님이 그곳의 어느 부잣집에 가정부로 일하다가 군대에서 휴가 나온 그집 주인 아들에게 임신이 되어 쫒겨나서 아빠 없이 태어났다.(그 시대에는 그래도 법적인 보호가 없었다고 한다) 시어머님은 어려서부터 무척 공부하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서 재봉을 배워서 바느질 마이스터가 되었다. 그녀의 홀어머니는 겁이 많고 생활력이 없어서 시어머님이 어려서부터 가장 노릇을 했단다. 동네 축제에서 프란츠(Franz)라는 총각을 만나서 종교도 다르고 결손 가정이라고 시댁에서 몹시 반대하는 결혼을 했고, 시아버님은 큰아들을 낳은 후 전쟁포로로 소련으로 끌려가 5년 동안 징용살이를 했다.


하루에 몇십 리를 걸어서 재봉을 해주고, 대신에 감자나 빵을 얻어다가 어머니와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남았다. 남편, 그러니까 시어머니의 둘째 아들은 징용 중 잠깐 휴가와서 얻은 아들이었고, 시아버님은 징용에서 돌아와 세 살 된 둘째 아들을 처음 봤다고 한다. 남편은 지금도 그때 아버지와의 첫 상면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죄수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못 먹어서 야위고 눈이 움푹 꺼진 얼굴로 마당에서 흙장난하며 놀고 있던 작은아들에게 네가 누구냐?하고 물으니 저는 볼프강(Wolfgang)인데 당신은 누구예요?하고 되물었단다. 꼭, 앤서니 퀸이 나오는 영화 <25시>의 나오는 마지막 장면같이


정원사였던 시아버님은 틈틈이 과수원을 하면서 밤에 공부하여 철도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하시고 두 아들을 법률가로 키우셨다. 시어머님은 시를 좋아하셔서 100편이 넘는 시를 암기하시고 독서도 많이 하시며 작가 토마스만(Thomas Mann)을 특히 좋아하셨다. 그 귀한 둘째 아들을 내가 뺏어갔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남편 프란츠가 사망한 후에도 혼자 20년을 더 사셨다. 시어머님은 블라우스까지 손수 만들어서 입으시고, 시아버님 묘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시며 꽃을 심고 잘 가꾸셨다. 독일의 공동묘지는 아주 아름답고 잘 가꾸어져 있다. 우리 가족묘는 앞으로 5년이면 임기가 끝난다. 벌써 아들, 손자, 손녀들이 거의 30명이 되지만, 아무도 묘에 관심이 없고, 우리만 마지못해 관리하고 있다. 그곳의 정원사에게 비용을 내면, 관리를 해주지만 그것도 복잡하다. 그리고 만약에 임대계약이 끝나면 경고 편지가 오고, 연장하겠다는 연락이 없으면, 그냥 파서 뼈를 추려서 어디로 가져가고 다시 새 무덤이 된다. 동양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괜찮다.


한번은 시어머님이 점심을 드신 후 , 예전에 간호사였지? 관장 할 줄 아니?하고 물어보셨다. 갑자기 너무나 우습고 가련한 마음이 들어서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관장을 해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약국에 가서 물어보고 그냥 해드렸더니 화장실 다녀오신 후에 너무나 행복해하셨다. 후에 알고 보니 시어머님은 병원에 가는 것을 제일 무서워하신다고 하셨다. 두 아들도 다 가정 분만하셨다고 하셨다. 이유를 여쭈어보았더니, 병원은 세균이 많고, 아이가 바뀔 수도 있어.라고 하셨다. 날 보고 관장 잘했다고 우리 묘에 자리가 하나 남아있으니, 너도 죽으면 오너라는 특별 초대까지 받았다. 평생을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하시고, 규칙적으로 건강식 만드셨어도, 때가 되니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마치고 무덤으로 관을 가지고 갔었는데 웬 개구리 한 마리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윤회를 절대 안 믿는 크리스천, 부처 같은 남편이 내 귀에 대고 저 개구리 좀 봐. 어머니가 벌써 개구리로 환생하셨나 봐.하고 말해서 나는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했다.


돌아가신 날, 아기같이 깨끗한 시체를 장갑도 안 끼고 다 씻겨드리고 분홍색 잠옷을 입혀드렸더니 예전의 미움이 다 사라지고 나 먼저 갈게. 언제 또 만나자. 하시며 웃으시는 것 같았다. 남편은 매번 귀찮아하지만, 우리는 자주 가서 묘를 봐드린다. 이번에는 어머님, 우리가 한국으로 4주 휴가를 가기 때문에 못 옵니다. 보고 싶어도 참으시고 잘 계셔요.라고 인사를 하고 오던 중, 마인츠역에서 그런 수난을 당한 것이다. 개구리 농담, 그리고 우리만 여행 간다고, 시어머님의 오기가 발동하셨는지도 모를 일(웃음)


그런데 오늘 또 한 번 독일 남편과의 문화, 정서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묘 정리하느라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녹초가 되어 쓰러질 것 같은(남편은 내가 묘 정리를 하는 동안 물만 떠다 주고 새소리를 들으며 민들레를 캐러 다닌다.) 집사람을 옆에 두고 그까짓 돈 절약한다고, 여기저기 픽업을 부탁하는 전화를 했다. 아니, 마인츠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택시비가 얼마나 든다고, (내 생각에 많아야 100유로 정도?) 아이들과 친척, 친구들에게 좀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를 했으나, 오겠다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시각장애인 단체에서 전화가 오면 수건 한 장에 120유로씩 내며 팔아주고, 봉사단체에 선심을 많이 쓰며 살면서 왜 나에게는 이렇게 냉정할까? 만약에 한국 남자라면 벌써 기분 좋게 택시를 금방 타고 갔을 거다. 양자야, 정말 시집 잘못 갔다. 오늘 당장 이혼하자고 할까? 별 별생각이 다 났지만, 그냥 침묵으로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옆집의 친구, 실비아가 쏜살같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줄줄 나왔다. 마인츠역에서 억울하게 세 시간을 소비한 후, 귀가한 셈이다. 실비아는 예전에 자기가 마인츠역 근처의 보험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며 이렇게 도와줄 수 있어서 좋아.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줘.하며 휘파람을 불며 집에 데려다주었다. 저녁 7시 뉴스에 전기가 다시 들어와서 서 있던 기차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항상 부담 없이 사용하며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물과 공기 같았던 전기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고 기차가 마냥 서 있던 마인츠역은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시어머님, 이젠 제발 심술부리지 마세요. 저희도 이젠 개구리 농담도 안 하고, 한국 휴가도 잘 다녀올게요.

댓글목록

원영님의 댓글

원영 작성일

글 올리셨네요
안면암 홈피가  쓸쓸했는데요
부처  거사님 변호사 사업 버친ㅇ하시지요
그곳 독일도 무덥나요
건강하셔요
안면암 과천포교당 자주 오셔
허허 지명 대종사님과 얘기도 하시고
구봉 대선사님께도 찾아 가시고
아름다운 사찰  많은  곳  여행 하셔요
건강하셔요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석원영 보살님!

안면암 홈피가 오랫동안 쓸쓸했습니다.

소양자 보살님께서 귀한 글을 보내주시니 홈피에 생기가 넘치고 있습니다.

석원영 보살님이나 다른 보살님들께서도

글보시를 아끼지 않으신다면

대자대비하신 불보살님들께서 그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소중한 댓글 항상 늘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윤병예 합장

원영님의 댓글

원영 작성일

변호사 사무실 번창  하셔요
가보진 못  하지만
걸어서 세계 여행  같은 티비 프로
새벽 마다 꼭 봅니다
 체험하시는 보살님
건강이 부럽습니다

              정광월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소양자 보살님!

몇 달 전,
 안면암 허공회 총회 날 과천 포교당에서 잠깐 뵈었을 때
여전히 미모와 재능이 빛나고 계셨습니다.

시간이 너무 짧아 서운했었구요,


예전의 글도 주옥같았지만
오늘 게시글은 더욱더 사유가 깊어지시고 사랑이 충만해서  너무 부러웠습니다.

소중한 댓글 멀리서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윤병예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소양자 보살님!

작년에 안면암에 함께 참배하셨을 때
청정바다가 눈 앞에서 황홀하게 펼쳐지는 107호실에서
하룻밤 묵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소환되고 있습니다.

밤 늦은 시각 팔십 고령에도 불구하시고
문학 책을 읽고 계시던
보살님의 젊은이처럼 생기발랄하시던 모습에 저는 크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인리히 변호사님께서도 안녕하시죠?

두 분 오시면

제가 조촐한 점심 공양 올리고 싶다는

약속은 언제든지 유효하니까

꼭 기회를 주시면 몹시 감사하겠습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윤병예 합장


안면암 홈페이지 인터넷 사정 상 몇 년 전부터
미국 독일 등 외국에서의
안면암  홈페이지 접속이 불가능하니 매우 불편스럽고 아쉽습니다.

비행기 삯만 들고  독일에 오면
언제든지 보살님 댁에서 숙식이 가능하다는
예전의 말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겠지요??

믿고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계시답니다. ^^

지혜로우신 독일 시어머님께도 절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_()_ _()_ _()_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윤병예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