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 안면암 일기 } : 《한 권으로 읽는 불교 교리》 015 성과 구와 중도 (2) 2023.3.1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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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169회 작성일 23-03-13 20:44본문
015 성과 구와 중도 (2)
먼저 이런 물음을 던져 보자. “우리가 죽은 다음에 존재하는 무엇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모든 사물이 연기하는 상태에 있으므로 공하고 공하므로 서로 무한히 얽혀서 포함해 있다는 석존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저 질문은 아예 성립되지 못한다. 왜냐. 먼저 “우리가 죽는다.”는 전제부터가 틀렸다. “우리”라고 하는 것은 변하는 상태에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연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에 있다. 고정된 것이 없는데 고정된 개념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라고 이름 붙인 데는, 이미 자의적인 “결정”이 개입되어 있다. 고정된 것이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에 있는 것을 “우리”라는 개념으로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개념에도 제멋대로의 결정이 스며 있다.
항상 변하는 과정에 있는 우리가 특별히 산다고 할 것이 없는데, 설사 있다고 기정사실화해서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고정적으로 있지도 않은 “우리” “태어남” “삶” “죽음” 등을 기정사실화해서 답은 만들면 양극단의 결정론이 나온다. 즉 “있다” “없다”이다. 죽은 다음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있다거나, 아무것도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연기하고, 공하고, 포함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물은 한마디로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과정에 어느 한 순간의 것만을 집어서 최종적인 것으로 말할 수 없다.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연기, 공, 성구사상은 있다거나 없다는 양극단에 대한 중간 입장, 즉 중도가 되는 것이다.
항상 변하는 과정에 있는 우리가 특별히 산다고 할 것이 없는데, 살아 있다고 기정사실화해서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고정적으로 있지도 않은 “우리” “태어남” “삶” “죽음” 등을 기정사실화해서 답을 만들면 양극단의 결정론이 나온다. 즉 “있다” “없다”이다. 죽은 다음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있다거나, 아무것도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가. 연기하고, 공하고, 포함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물은 한마디로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어느 한 순간의 것만을 집어서 최종적인 것으로 말할 수 없다.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연기, 공, 성구사상은 있다거나 없다는 양극단에 대한 중간 입장, 즉 중도가 되는 것이다.
ㅡ 죄송합니다만, 내일 또 이어 게시봉사하겠습니다.
< 생강나무 >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오늘의 부처님 말씀]
“들을 때에는 들려지는 것만 듣게 하고
볼 때는 보이는 것만 보게 하고
생각할 때는 생각만 하게 하라.”
[ 열매 ] / 이태정
최선을 다해 단단해진 다음
풋생각 하나 없이 바람을 견디다
독하게 떨어질 결단,
그 생각만으로 가득한 것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오정숙님의 댓글
오정숙 작성일
너무 어렵네요 ~~
안면암은 벌써 이리꽃이 많이피었네요
생강나무 꽃 동백 .....감사합니다
일심행님의 댓글
일심행 작성일
나무 불,법,승
거룩하신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연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에 있다."
가만, 가만이 되새기며
나란 작은틀에 묶여
헤메이는 자신을 봅니다.
끊임없이 변한다는 큰스님 말씀에
우리란 것을 觀하며 위로 받습니다.
광명진언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파를 타야 흠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파를 타야 흠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 무드라
마니 퍄드마 즈바라 프라파를 타야 흠
참으로 귀한 인연에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