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안면암 일기] : 101 마음과 부처와 중생 (4) (화엄경8) 2022년 11월 27일 日(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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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7건 조회 203회 작성일 22-11-27 07:52본문
101
마음과 부처와 중생 (4)
(화엄경 8)
업의 바다를 응시하는 삼매는 바로 마음의 바다에 비쳐지는 연극을 감상하는 것이 된다. 번뇌와 업의 바다가 바로 마음이 지어서 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순간 그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다.
김달진 시인의 시집에 ‘샘물’이라는 시가 있다.
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구름이 떠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았다
작은 샘물 속에서 바다와 같이 넓은, 온 하늘을 다 비춰본다는 내용이다. 샘물 속에 온 지구가 다 들어 있다. 우리는 앞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로부터 바다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우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온 바다,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온 세상이 다 들어 있다. 그 마음을 떠나서 업의 바다, 번뇌 꽃의 장엄, 번뇌의 광명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의 마음을 온 세계를 비춰보는 샘물로 보는 의미에서 한 티끌 속에 부처님 세계의 바다가 들어 있고 모든 세계에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조그만 샘물이다.
그곳에서 온 우주의 바다를 다 볼 때 부처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중생이 된다. 화엄경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 마음은 항상 부처이면서 동시에 중생이다. 마음을 보고 보살행을 닦는 수행이 있으면 부처이고, 그렇지 못하면 바로 중생이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한 몸이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
“병자를 돌보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것은 곧,
나(여래)를 돌보고 간호하는 것과 같으며
돌보고 간호하는 보시를 행함으로써
큰 공덕을 얻고 좋은 이름이 두루 퍼지며,
마침내 감로의 법을 얻게 된다.”
ㅡ 증일아함경
< 늦가을비 > / 손해목
늦은
가을에
비가 내리면
사그락 거리던
낙엽들이 조용히
묵상에 잠겨 들고
심중에 서려 있던
어렴풋한 그리움
쓰라린 애흔도
비에 적시어
흐느껴 운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석원영님의 댓글
석원영 작성일
묵상 카톨릭 신자 시인이
나태주 시 보내드렸더니...
어졔 조계사 일주문 불사 210일 회향식
사중스님들과 신도회장 김의정님 여성108인 회장님과
임원진
허길량 작가의 동자승 전시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석원영 보살님!
저도 나태주 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합니다.
조계사 일주문 불사가 210일 회향식이었나요?
3주전쯤 우연히 조계사 참배했을 때 국화전시회 참으로 좋았습니다.
보살님처럼 불교계 문화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할 수 있다면 . . . . . .
소중한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해탈심 합장
ㅇㄷ님의 댓글
ㅇㄷ 작성일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았다
-> 우리의 마음을 온 세계를 비춰보는 샘물로 보는 의미에서
한 티끌 속에 부처님 세계의 바다가 들어 있고
모든 세계에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조그만 샘물이다.
조그만 샘물에 많은 것을 담겠습니다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ㅇㄷ님 !
어려운 법문 용케 잘 납득하셨습니다.
저도 조그만 샘물에 많은 것을 담고 싶습니다.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해탈심 합장
석원영님의 댓글
석원영 작성일
법보신문에 서울시 도보에 빨간색 십자
군 생활에서도 도움 주는 건 카톨릭
김수환 추기경 선종하셨을 때 시가 좋아
신부님 친절하게 그 시 보내 주셨음
동네 교회 새신자 노래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 불러 주었어요
그때 장경동 목사
윤형주씨 오셨어요
기타로 청소년 포교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석원영님!
법보신문 가끔 보고 있는데 유익한 기사가 참 많더군요.
군 포교가 상당히 중요한데 우리 불교에서는 군법사 지원이 모자란다고 들었습니다.
청소년 포교는 그들의 눈높이에 알맞게 해야 하지만,
적절히 한다는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불교는 거의 전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촛점을 맞춰야 할 듯합니다.
소중한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