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안면암 일기] : {인간의 완성} 92 무명의 원인 (3) (원각경 1) 2022년 10월16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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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2건 조회 167회 작성일 22-10-16 18:48본문
92 무명의 원인 (3)
(원각경 1)
이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모든 세계가 시작되고 끝나고 모이고 흩어지고 생기고 없어지고 하는 것이 모두 윤회하는 것이니라. 윤회에서 나오지 못하고 원각 등 둥근 깨달음 또는 원만한 깨달음을 이야기하면 그 원각의 성품도 윤회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라.
비유해서 말하리라. 구름이 달아나므로 달이 가는 듯하고, 배가 지나가므로 언덕이 옮기는 듯 하는 것이니라. 구름과 배의 가는 것이 쉬지 아니하면 달이나 언덕의 움직임이 먼저 머무르려 하여도 될 수 없는 것이니, 나고 죽는 데서 바뀌 돌 듯이 하는 마음이 깨끗하여지지 못하고서 원각자리를 알아 보려고 한들 어떻게 그러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대가 세 가지 의혹을 내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부처님의 묘한 원각의 자리에는 미혹함도 없고 깨닫는 것도 없으며 성불하는 것도 없고 성불하지 못하는 것도 없느니라. 윤회하는 일도 없고 윤회하지 않는 일도 없어서 허공과 같이 평등하건만 윤회하는 마음으로 윤회의 소견을 가지기 때문에 부처님의 고요한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니라. 그래서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들은 먼저 비롯함이 없는 때부터의 윤회의 근분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먼저 부처님은 윤회 속에서 아무리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윤회 속에서 원각을 이야기하면 그 깨달음은 이미 깨달음이 아니라 윤회의 이야기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중생에게 본래적인 깨달음이 있다는 말은 자기라는 아집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성품이 있다는 뜻이다. ‘나’를 내세울 때 구하는 것이 있고 아쉬운 것이 있으며 구하는 것이 있을 때 좌절이 있고 고통이 있다. 그러나 ‘나’에 대해서 완전히 쉬었을 때 괴로움이니 즐거움이니 할 것이 없다. 본래 부처의 상태가 즐거움이라면 그 즐겁다는 뜻은 나를 중심으로 특별하게 매달리지 않을 때 나타나는 한가함과 자재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 성불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왜 지금 나에게 무명이 있느냐?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문제가 된다.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든지 ‘나’와 관련시키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열반의 이상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것은 어떻게 먹는 것인데’하고 묻는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본래 부처라는 말을 듣고 왜 나에게 무명이 있느냐는 말도 무조건 모든 일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본래 부처는 먹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껍질을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잠재성이다.
ㅡ 죄송합니다만, 내일 다시 이어 게시봉사하겠습니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
“맡은 바 없이 힘쓰면 이 세상을 안락하게 살아 가리라.”
< 불소행찬 >
< 경봉스님 > / 열반송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
야반 삼경에 춤을 볼지어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인터넷이 안 되는 곳에 오래 있었으므로
게시봉사가 너무 늦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