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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 [안면암 일기] : {인간의 완성} 84 인무아와 법무아 (3) 2022년 9월14일 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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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1건 조회 179회 작성일 22-09-14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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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인무아와 법무아  (3)

(능가경 2)

    유식불교에 있어서 인무아이고 법무아인 이유는 일체만물이 다 식이 분열해서 나타난 바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객관세계를 보지만 그것은 실재하는 주관이 객관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지어낸 주관이 그 그림자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 객관세계가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거나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말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서는 생략하자.

     여기 《능가경》에서 선의 단계를 4가지로 구분했는데, 그 기본적인 기준은 무아사상을 어떻게 깊게 이해하느냐는 정도의 차이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가장 낮은 단계의 어리석은 범부들이 닦는 선이 인무아 즉 아공만 이해한다고 하는데, 아공만 이해하고 법무아나 법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이냐는 문제가 떠오른다. 사람이 인무아만 알고 법무아를 모르는 것은 마치 내 몸에 나라는 실체는 없지만 내 몸은 실체가 있으므로 내 몸이 있는 한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보면 몸에 대한 집착이 어리석게 생각되지만 이 같은 집착은 실제로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어서 보존했다. 때가 되면 육체에 다시 생명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육체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대에는 이 몸을 살리기 위해서 미라를 만들 사람은 없다. 모택동의 시신도 약물처리를 해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목적이 몸이 다시 살아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아니다.

     그러나 현대인 가운데는 '나는 죽지만 내 자식은 계속 생명을 받아서 나의 대를 이어간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다. 내가 나의 자식에게서 살 것으로 기대한다. 이 같은 생각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무아를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는 잘못된 코스에 든다.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을 무연자비를 실천하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육체연관의 이유 때문에 자기의 분신으로 보게 된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무아라고 부정하더라도 자식을 자신의 분신으로 보고 그 자식에게서 생명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인무아나 아공마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인무아만을 아는 사람이 닦는 선을 어리석은 범부들이 닦는 '우부소행선'이라고 한다.


                    ㅡ 죄송합니다만, 내일 또 이어 게시봉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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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


"참회하는 마음은 쇠갈고리와 같아서

능히 인간의 잘못된 마음을 억제한다.

그러므로 항상 참회하는 마음을 가질지어다.

                                                                <  불교우경  >


<  구름에게 길을 묻다  >  /  정연복


잔잔한 바다같은

파란 하늘에 평안히 떠가는

구름에게 길을 물었더니

살짝 귀뜸 해주네.



"높은 하늘에서

가만히 내려다 보면

인간 세상은 너무 분주하고 복잡하게 돌아가네

사람들도 쓸데없는

생각이나 고민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딱히 무슨 일이 있겠어

그냥 제 길 가면 되는 거지

지나친 욕심과 허영심

마음의 질투와 경쟁심에서 벗어나

하늘같이 평화롭고

깊은 바다같이 고요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평화롭고

깊은 바다같이 고요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순간순간

가고 싶은 길로 가면 되는 거지."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