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스님 [안면암 일기] : {인간의 완성} 66 아와 무아 (2) 2022년 7월13일 水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180회 작성일 22-07-13 07:05본문

66
아와 무아 (2)
(열반경 2)
부처님은 '나'가 없음을 가르치다가, 반대로 '나'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의 비유를 한꺼번에 든다. 벌레가 나뭇잎은 파먹다가 글자를 만들지만 그것이 글자인 줄을 모르듯이 엉터리의원이 무조건 우유로 만든 약이 좋다고 하면서 우유 약을 조제한다면 그 약은 양의가 조제한 약과 재료와 모양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그 엉터리 의원은 우유약이나 병에 대해서 알지 못함과 같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욕망에 찬 중생이나 삿된 외도들이 '나'가 있다는 것을 말할 때 그 '나'가 있다는 말이 부처님이 열반사덕으로 설하는 '나'라는 말고 같기는 하지만 중생이 말하는 실체로서의 '나'와 부처님이 말하는 진리로서의 '나'가 전혀 다르고, 중생들은 자신이 말하는 '나'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부처님이 가르치는 '나'는 더욱이 헤아릴 수도 없다고 한다.
먼저 무아를 공부할 때 종류의 '나'를 정리했었다. 한 가지는 편의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서의 상식적인 '나'와 다른 한 가지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실체적인 '나'이다. 부처님은 호칭으로 부르는 임시적인 '나'는 인정하지만, 영생불명의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두 가지의 '나'라고 하지만, 한 가지의 나는 내용이 없는 '나'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요, 또 한 가지의 '나'는 실체적인 것으로 인연법이나 공사상에 의해서 부정되기 때문에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열반의 덕으로 '나'를 내세운다. '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처님이 있다고 하는 '나'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나'는 우리가 보통 경험하는 그런 종류의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나는 인간의 불성을 믿는 '나'이다.
얼마 전에 필자는 결혼식의 주례를 섰다. 결혼하는 신랑은 오랜 기간 동안 극악무도한 깡패의 집단에 속해서 많은 폭력을 휘두르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 바닥을 떠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전형적인 폭력배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경우를 따지려고 해도 그 말을 듣는 시늉도 아니 하고 오직 억지로 윽박지르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필자에게 실토했다. 자기의 의식이 아무리 듣지 않으려고 해도 자신의 심층의식은 옳고 그른 것을 끊임없이 판단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폭력을 휘두르던 동료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누가 좋은 말을 할 때에 상스러운 말을 내뱉어서 상대의 말을 막거나, 다른 장소에서 동료들끼리 옳고 그름에 대해서 관찰을 교환하거나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한구석에는 자신을 관찰하는 눈이 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밤 2시가 넘은 뒤에도 생수를 담기 위해서 절 마당에 고성을 내면서 들어오는 이들을 불친절하게 대한 적이 있다. 부처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 담배꽁추를 함부로 버리는 이 등에 대해서 짜증서러운 태도로 대한 적이 있다. 그런 경우, 그 당시의 상황에만 취해서 상대가 불성을 가진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임을 깜빡 잊은 것이다. 부처님이라면 부드러운 음성과 태도를 보이면서도 그들의 마음에 큰 글씨를 또렷하게 새겨 놓은 방편을 쓰셨을 것이다. 함부로 행동하고 고성을 지르는 사람들도 그들의 심층의식 한구석에서는 자신과 남의 깊고 옅은 마음을 계속해서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순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보살의 마음을 가지고 보살의 행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열반의 한 덕으로서의 '나'는 나와 남을 가르고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는 사람과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르는 그러한 분열된 '나'가 아니다. 남에게서 '나'를 보고 '나'에게서 남을 보는, 중생의 병을 자신의 병으로 앓는 그러한 '나'이다. 그래서 상락아정이 단순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것'이 아니라 법신이 항상하고 열반이 즐겁고 여래가 '나'이고 정법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소갈머리 없는 변덕쟁이 '나'가 아니라,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여래로서의 '나'이다. 진리를 행동하는 자로서의 '나'라는 말씀이다. 이 같은 '나'는 인연법 · 무아 · 공사상 · 참사상 · 일체중생 실유중생 등의 정신과 그대로 일치한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오늘의 부처님 말씀>
가시에 찔린 상처는 작지만 탐욕과 성냄에 찔린 상처는 깊고도 예리하다.
가시에 찔린 상처는 쉽게 아물지만 탐욕과 성냄에 찔린 상처는
몇 겁이 지나도록 낫지 않고 한량 없는 세상의 몸에까지 미친다.
< 대장엄론 >
< 합일 > / 김해자
거기, 밖이 무너지고'
여기, 안으로 삼켜져
눈 감는 음절들
거기까지 너였다.
여기까지 나였다.
경계가 차츰 무뎌지고 무너지다
문득 모든 말들이 끊긴다
하지 못한 말,
이미 한 말,
들이키고서야 합쳐지는 입과 입
여기서부터 검은 숲,
침묵이 범람한다
말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나조차 잊어버려야 나로 돌아갈 수 있다
너조차 잊어버려야 너에게 들어갈 수 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좌선은 최상의 멋스런것은 맞으나 마음이고요하다고해서 무심이아니다 . 천가지 만가지가 들어가있다 . 완전한 구경무아가 제대로된수행이다 . 가는데마다 보현의 꽃을 피운다 . 수연 불자 ! 법안의 안묵을 바른정견 구경무아 . 기능능력 효능 의 무안한 힘을 알린다 . 무아를 통달해야 참다운 보살 중요한 핵심은 무아를 알아야한다 .반야부의공사상은 아상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없는 것이 공이다 . 집착 이기심 조건없이 할수있을때 밑을때확신할때 본질을잘알고 방편 법문을 알면 방편이 목적이되는것은 다르다 . 아뇨다라삼약삼보리의 지혜! 사물의투쟁 갈등 생기는것이 실체없는것을 관 하는 기운 지혜다 참성품 ! 비는 안타까움 원은 세상에왔을때 온 생 명의 부처님말씀이 관계속에 서로가서로를 상생시키는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 보살님!
금강경 구경무아분 , 궁극의 경지에 내가 없다.
하지만 저 같은 중생은 순간 순간 무아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는 연기법 속에
서로가 서로를 상생시키는 종교이지만,
이기적으로 자기와 가족만을
생각하니 너무 안타깝지요.
소중한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