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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스님 {안면암 일기} : [ 인간의 완성 ] 43 역설적 부정의 이유 (2) (금강경 2) 2022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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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3건 조회 190회 작성일 22-05-25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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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유경 ]

(4) 세상을 초월한 대인(大人)의 공덕을 말함


 1) 구(求)함이 없는 공덕

   너희 비구는 마땅히 알라.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번뇌도 많지만,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함도 없고 하고자 함도 없기 때문에 그런 근심이 없다. 다만 욕심이 적기를 위해서도 힘써 닦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그것은 능히 모든 공덕을 나게 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욕심이 적은 사람은 곧 아첨으로써 남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 않고,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 언제나 모자람이 없느니라. 이렇게 욕심이 적은 사람은 곧 열반을 지니나니, 이것을 일러 '욕심이 적음'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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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역설적 부정의 이유 (1)

(금강경 3)


손가락이 달을 가리킨다면 손가락을 속제(俗諦)이다.

달은 언어에 의해 가리켜진,

그러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진제(眞諦)이다.


    《대품반야경》과 《반야심경》을 살피면서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무한부정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반야바라밀을 닦는 절대부정 · 무한부정에 있어서 사물이나 사물의 공함을 알려주는 가르침이나 사물의 공함을 체득함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종류의 소득도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기본자세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오온  · 십이처  · 십팔계  · 십이인연  · 사성제  · 지혜 ·  소득이 다 부정된다. 이 같은 철저한 부정을  《금강경》에서는 간단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 간단한 표현이 바로 3단계의 긍정 · 부정 · 긍정이다. 일차적으로 어떤 것을 제시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그 임시적인 이름만을 말하는 방법이다. 앞에 예를 들었듯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경우, 그것은 이미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여기에는 반야바라밀을 닦는 사람이 전제되고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잘못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엄연히 있고 또 우리가 목적하는 반야바라밀을 모르는 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계속 부정되는 것이라고 전제해서 '단지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나타내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공의 실천을 통한 육바라밀을 닦는 방법으로 부정 뒤에 긍정의 꼬리를 달아 주는 것은 중생의 근기에 순응해 주는  《금강경》의 친절이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즉 '만약 모든 사물을 보되 그 겉모습의 상을 지우고 모양을 본다.'는 앞 부분은 부정을 나타내고, '그러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는 뒤부분은 긍정을 나타낸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도 마찬가지로 부정과 긍정의 순환형태이다. '머무는 바 없이' 부분은 부정이요, '마음을 내라'는 부분은 긍정이 되는 것이다. 부정과 긍정이 어어지지만 뒤의 긍정은 항상 앞의 부정을 전제로 한 잠정적 긍정이다. 앞부분의 부정이 떨어지고 뒤의 것만 홀로 긍정되는 순간 뒤의 것은 공사상에 위배된 것으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 된다.

     또 이것은 현상의 세계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고 공의 세계에서 현상의 세계로 나오는 형식으로도 볼 수 있다.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현상세계에서 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공을 전제로 해서 공의 세계에서 현상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상을 지우고 일체의 사물을 보는 것은 현상 세계에서 공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바로 여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공의 세계에서 현상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공의 세계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방식은 《금강경》의 전체적인 구도에 걸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주의할 점은 긍정이 무조건적 긍정이 아니라 반드시 앞의 부정을 전제한 임시적 또는 잠정적 긍정형태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정의 형태든지 긍정의 형태든지 육바라밀을 닦는 수행자세로서 지켜야 할 철저한 절대부정의 자세는 유명한 뗏목의 예로 나타난다.  《금강경》의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으로 비유한다. 예를 들면 반야발밀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까지도 공사상을 체달하기 위해서 버려야 할 터인데 일반 사물에 대한 집착은 말할 것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육바라밀을 통해서 공사상을 실천하는 기본자세로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내포하는 이유를 나타내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阿뇩多羅三먁三菩提)', 즉 '일정하게 고정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다.'라는 말이다. 만약 나와 저, 내 것과 남의 것,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가 수행자의 마음에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 수행자는 이미 그것들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공과 무소득의 정신에 보시바라밀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선과 악의 개념,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개념이 고정되어 있다면 진정한 무소득 · 무장애의 자세로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속에 고정적으로 정해진 바가 있어서 그것에 걸리기 때문이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 명(名)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고정된 법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고 하는 태도는 다시 저 유명한 과거의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생각할 때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현재의 마음은 일정한 형상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잡을 수 없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구태여 마음까지 다 들먹이며 해석하지 않더라도 얻을 수 없다는 불가득(不可得)은 바로 무소득과 일치한다.

    그리고 무소득은 일정하게 고정된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과 일치한다. 불가득과 무소득은 또한 일체법을 다 뗏목으로 보는 태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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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 오늘의 부처님 말씀 >

갈애와 성냄은 큰 바다와 같고 의혹은 파도와 같나니

그 험난함을 건너려고 한다면 마땅히 보시와 지계와 지혜를 닦아야 한다.

                                                                        < 제법집요경>

<  간격  >  /    안도현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꺼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 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하루아침에고향길밟으니  세월이긴 것을  알았도다  .시즉차용  이차용  아뇩다라삼약삼보리는    경계를 적할때    불이법을  판단한다  .경계를쓰는데  끄달리지않는다  .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    심법일그렇다  .  사대원무주    오온보내공    장두임자인  흡사  참춘풍  송조법사의  계송    무주와  영원한행복을  ...목전무법  내외명철  사무친이반 무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시방삼삼세  제망찰해  불법승  !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생기발랄하신 큰보살, 원만행 보살님!~

저는 어제서야 4차 백신 접종(화이자)을 마쳤습니다.
이번에는 설마하고 타이레놀 복용을 하지 않았더니
1,2,3차 때보다 후유증이 심해 할 수 없이 2알씩 계속 복용하고 있습니다.

초여름의 날씨입니다.

노보살님 극진히 모시랴,
새벽예불 도움주시랴
댓글 다시랴 
수고가 너무 많으십니다.
부디 건강관리 잘하십시오.

소중한 댓글 감사 감사드립니다.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