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아버지 첫 忌日(기일)에 부르는 <思父曲(사부곡)> ㅡ 생각과 말과 글과 행동이 일체를 이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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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탈심게시봉사 댓글 16건 조회 98,583회 작성일 20-09-17 16:15본문
★ 우리 아버지 첫 忌日에 부르는 <思父曲>
생각과 말과 글과 행동이 일체를 이루시다.

생신(80세) 다음날의 우리 아버지 ㅡ
스승의 날,
초등학교 동창회장이 해마다 거르지 않고
보내 드리는 蘭 화분 앞에서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365일 애용하시는 전자 오르간을 치시며


88세 생신 날
사랑하는 슬하의 3녀 1남과ㅡ
편모슬하에서 크신 아버지의 콧수염은
오래 함께 사셨던 양반 할아버지의 상징입니다.
부지런하고 정이 많았던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온갖 집안 대소사 심부름을
도맡아 하셨는데
점잖게 수염을 기르셨던 할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5남1녀 중 모두 다 떠나고 유일하게 남은
유복녀(遺腹女) 여동생(가장 유복하심)과 외아들 ㅡ 사랑하는 여동생과 함께 한 마지막 추석 (92세)

국전 서예초대작가인 큰딸의 서예 앞에서 이름을 자랑스럽게 가리키시는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어려서부터 부자 아버지 아저씨들보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신 아버지를 존경하며 자부심을 갖고 자랐습니다.
부지런하신 아버지는 새벽부터 학교 채소밭에 물 주시고 오물지게를 지시고 거름주시고 운동장을 매일 쓸으셨지요.우리 사택에서 선생님들 목욕시키려고 장작패서 불때시면 제가 선생님들 부르러 뛰어다니던 아름다운 추억도 있구요. 소풍날이면 도시락 못 싸온 학생 주시고 굶으신 걸 나중에 알았고 공책이랑 학용품을 많이 사주셨지요.
저 육학년 타 군으로 전근가는 날 학생 부모님들 다 나와서 울며 윤교장 만세를 불렀지요.저는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큰 딸

말년에 오로지 독학으로 열심히 쓰신 서예
<강직소탈체>입니다.

자손들이 효도한다고 스스로 만족하시며 즐겨 쓰시던
孝之家(효지가), 知足者幸福也(지족자행복야),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가장 자주 쓰셨으나 저는 불행히도 家和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洗心(세심)도 참 열심히 쓰셨지요.

전화를 걸고 받는 기능으로만 쓰는 핸드폰을 처음 선불받고 어린애마냥 기뻐하시는 ㅡ

검버섯이 무성한 얼굴이시지만 백발노인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참 보기좋습니다.
딸들은 벌써 임플란트 치아를 몇 대씩 심었는데
아랫니 치열이 고르지 못해서 보기엔 좀 거북해도 의치 하나없이 아주 건강하신 치아입니다.
반찬투정이라곤 일평생 한번도 안 보여 주셨으며,
밥한톨 생선 가시뼈 하나 허투루 버리신 적없으신 근검절약의 高手(고수)이셨습니다.

.
대단히 행복했던 생전 처음의 일본 가족여행.
아! 아!~ 다시는 돌아 오지 않을 너무나 그리운 시간입니다.
한국 대중가요를 십여 곡 구성지게 부르던
중년의 나룻배 사공은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하시는
우리 아버지(92세)께서 최고령 한국인 여행객이셨다고ㅡ
저의 장하고 믿음직한 사위가 일체 경비를 다 대었습니다.

평생 아들바라기 하시다 셋째딸집에서 떠나기 며칠 전 ㅡ 톨스토이의 <인생독본>







00 다문화가족센터에서 동남아 어린이들에게
한자 교육을 시작하신 구순이 넘으신 우리 아버지!
유감스럽게
한국어 말하기에도 힘든 어린이들에게
한자교육은 아버지나 어린이들 양쪽 모두 어려워 얼마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1년 365일 계속되는 조상 망배 시간>
구십 연세에도 불구하시고 조상님 계신 공원묘지를 향해 망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는 노구의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아버지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간이 망배 시간입니다.
초등학교 정년퇴직하신 후,
남양주 수동의 언니네 전원주택에서 빈터를 개간 후 유기농 농사지으시어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시느라 무릎관절통이 있으셨지만 요즘은 아프다고도 안 하시지요.
허리도 아직 꼿꼿하신 편인데 조상님께 1년 365일 매일 망배한 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년 전 ㅡ



★ 13년 동안의 일기장 중 일부
조상님들께 불효를 저지르려는 철 없는 아랫 사람들과
문중 문제로 신경쓰시다 뇌출혈을 일으켜 뇌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후부터 치매 걸리지 않으시려고 매일매일 빼곡히 한두 장씩 쓰시던 일기장 중 일부.
타인에게 보여 주기 위한 일기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성찰과 꾸밈없는 삶이 기록된 증표

작년 8월 16일 오후 4시에 운명하신 아버지께서
7월 19일금요일
불과 몇 줄로 일기쓰기를 마치셨습니다.
꺼져가는 힘으로 연필을 들 여력마져도 없어지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일 아침 9시 전화 문안인사를 드리던 여동생 병원 검진 때문에 대신했던
저와의 전화 통화 얘기로 영원히 막을 내리셨습니다.

작년 11월부터
아버지께 여동생대신 제가 카톡으로 매일 아침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주로 제가 찍은 사진이 많았으나 우리 집안의 대소사를 보고하는 형식도 있지요.
9월부터는 저녁 문안인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제 서툰 솜씨로 열렬히 사부곡을 부르면서
세월이 너무 흘러 버렸지만 아버지께 여쭤 보았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
. . . . . . . .
저 혹시 살아오면서 경솔한 적 있었나요??"



양력 8월 15일 첫 기일에 언니가 간소하게 준비한 꽃다발.
엄마 아버지께서 합장되어 계신 기품있는 키큰 소나무 아래.
다정다감한 여동생이 소중히 집으로 안고 와서
멋지게 장식하여 며칠 동안 부모님 바라보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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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端雅)하시고 일평생 성실근면하셨던
우리 아버지(94세 별세)께서
작년 8월 16일 광복절 다음날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벌써 일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초등학교 교육자로서 48년 재직하시고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신
아버지께서는
애처가셨으며
우리 사남매에게 공평히 나눠주는 무한한 사랑으로 일관하신 보통사람이셨습니다.
매사에 솔선수범하시며
민주적으로 자식들을 교육하셨는데
언제나 가장 저의 뇌리 속 깊숙히 박혀 있는 것은
생활 속에서 은연 중에 가르쳐 주시는 정신적 교육입니다.
다섯 살 위의 우리 언니는
워낙 총명했으나 시골 국민학교 출신이라
서울의 보통 중학교에 진학해서 전교1등을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지만,
저는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으며 최초로 각인된 장면입니다.
"경솔하기는. . . . ."
심각하게 한 말씀하셨습니다.
초등학교 3,4학년으로 기억되는데
어린 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버지 별세하실 때까지 한번도 여쭤 본 적없었습니다.
하지만
매사에 경솔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일평생 경책으로 삼아 살아온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저에게 잠재적으로 좌우명이 될 정도의
이 큰 사건을
곰곰히 생각해 보니
경솔하면 실수를 하게 되고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큰 후회를 낳게 된다는 이치를 가르쳐 주신 것같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아버지께 살아 오시는 동안 회한이 남는 일은 없으셨냐고 여쭈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나이 되도록 회한 한번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니?!"
심각한 얼굴로 저를 한 번 응시하시더니 더이상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알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녀1남 저희들은 초등학교에 재직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학교 안 사택에 살았으며,
두 살 터울의 여동생과 그 아래로 또 두 살 터울의 남동생보다
독서율이 높은 편이었습니다.
물론 만화도 꽤나 봤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만화의 흥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지요.
제가 1953년 생이니
그 당시는 보릿고개여서 보통사람들의 삶이 무척이나 고달프고 힘들어
동화책이나 위인전을 맘껏 읽을 수 있는 어린 학생들이 드물었습니다.
운 좋게 책을 가까히 하는 둘째딸을
우리 아버지께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책 많이 빨리 읽는다고
환한 얼굴로 자주 자랑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아버지는 한번도 글을 써본 적 없는
어린 저를 <문학소녀>라고 추켜세워 주셨고
엄마 역시 덩달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여튼 이 문학이라는 단어는 신비하고 매력적인 단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大器晩成(대기만성 ㅡ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他山之石(타산지석 ㅡ
남의 산에 있는 돌이라도 나의 옥을 다듬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 또는 허물과 실패까지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
#切磋琢磨(절차탁마 ㅡ
옥이나 뿔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도덕, 기예 등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수련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易地思之(역지사지 ㅡ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보고 이해하라는 뜻)
#同病相憐(동병상련 ㅡ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기다.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거나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끼리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서로 위해 주는 것을 비유하는 말. 등 등 등
四字成語(사자성어)들을
틈틈히 알기쉽게 그리고 일상생활과 접목해서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애처가이신 아버지께서는 엄마가 김장하실 때
밤새워가시며
배추 100포기 절이기서부터 무우씻기 무우채썰기 등
힘드는 일들을 항상 도맡아 해결해 주셨습니다.
기꺼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기분나쁘다거나 힘든 표정 한번 보여 주지 않으신 채입니다.
남편이 아내 돕는 일은 당연지사로 여기시는 분이셨지요.
동치미 무우들을 씻기 위해 커다란 고무다라이에 충분히 물을 부우시고는
손으로 서로 살살 조심스럽게 무우끼리
부딪치게 하셨습니다.
훨씬 쉽게 무우가 빨리 깨끗해졌습니다.
그리고선
타산지석 절차탁마등 사자성어를 가르쳐 주셨는데
저는 칠십이 다 된 나이에도 고구마 감자 무우 등을 많이 씻을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추억 속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우리 엄마 아버지의
합작품 #동치미 #백김치 맛은 우리 4남매에게는 천하제일 일미입니다.
신교육을 받으셨으며 외교성이 뛰어나셨다는
할아버지(39세 별세)께서
어느날 갑자기 서산 도립병원에서 맹장염으로
운명하셨다고 어린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었습니다.
돌아가신 부친을 몹시 그리워하시던 아버지께서는 당시 16세 소년이었는데
할아버지 사후 10년 동안은 매일 저녁 때가 되면
할아버지께서 대문을 활짝 열고 귀가하실 것만 같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전적 한국 여인이신 우리 여산 송씨 할머니>
제주도 정방폭포 아래서ㅡ 엄마 아버지께서 모시고 여행가셨을 때.
편모슬하에서 5남 1녀(유복녀)의 둘째로 자라나신
아버지께서는 효자이셨습니다.
30여년 전쯤의 어느날,
이미 결혼한 자식들에게 사모곡(思母曲)과 사친가(思親歌)를 펜글씨로 정성스럽게 써서 한 장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한국의 고전적 여인상이신
여산 송씨 우리 할머니께서
87세로 별세하신 지 3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강직한 펜글씨로 씌여진 思母曲(사모곡) 내용은 다 잊어 버렸지만,
외모는 평범하셨으나
음식솜씨 뛰어나시고 음전하셨던 키작으신 우리 할머니를 仙女로 표현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니께서 10년 이상 중풍으로 누워 계셨던 시아버지께
죽을 끓여 드리느라 놋수저가 닳아버려 반달 모양이 된 것이 여러 개였다는 것은
이미 엄마한테 몇 번이나 들었던 바였습니다.
그리고 작은 몸으로 시아버지를 업고 논 밭 구경을 다 시켜 드렸다는 말씀에서
크나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었습니다.
인욕보살님이셨던 우리 할머니께서는 평소 뜨거운 냄비등도
양쪽 두 손가락을 사용하여 그냥 맨손으로 가볍게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참, 얼마나 고달프게 열심히 살아오셨는지
우리 할머니 양 손가락에는 지문이 거의 없었습니다.)
인근 동네에서 효부로 칭송이 자자하여
충청남도에서 효부상을 주려 했지만,
할머니와 문중에서 정중히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思親歌(사친가)에서는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효도를 한다는
까마귀의 효심을 나타내는
反哺之孝(반포지효ㅡ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라는 뜻으로,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을 이르는 말)라는
古事成語(고사성어)를 난생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母傳子傳(모전자전) 할머니의 성품을 많이 닮으신
아버지께서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밝은 얼굴로 친절하셨으며
자손들에게도 친손 외손, 피 섞이지 않은 손자들에게도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집 영재급 똑순이의 간식 값을 잊으신 적 없이 항상 챙겨 주시는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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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버지의 思母曲(사모곡)을 본받아
2013년도에
전 시어머니에 대한 사모곡과
2015년도쯤 엄마에 대한 사모곡을 어줍짢은 글솜씨로 써내려 간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자식들 중 가장 불효했던 둘째딸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께
형편없이 모자라는 대로 思父曲(사부곡)을 불러 드려야 하는 차례입니다.
초등교육자답게
소탈하시고 근면성실하셨던
우리 아버지께서는
평소에 易地思之(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달고 사셨습니다.
이미 인간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사건건을 잘 이해하고 계셨으므로
어느 누구의 말이나 행동을 비판하거나 욕하시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또한 일평생 화투 등 雜技를 전혀 모르셨으며 복권 한 장 사신 적 없으셨습니다.
그저 성실히 재직 근무만 하시면서
학교의 꽃과 채소를 재배하시는 매우 정갈하고 부지런하신 분이셨습니다.
교육청 한번 사사로히 출입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습니다.
요즘 매스컴에서 하루종일 膾炙(회자)되고 있는
청탁이나 진실공방 고발 등에서 무척이나 멀리 계신 분이셨습니다.
정년퇴직 후에는 언니네 전원주택에서
노구의 몸을 이끌고 스스로 빈 땅까지 개간하시면서
유기농 농사를 지으셨는데 왠만한 농부 솜씨
부럽지않게 밭에 돌맹이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였습니다.
바라보는 자식들의 마음은 그저 흐뭇하기만 했었지요.
수확한 채소들은 자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들 심지어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 몫도 언제나 챙기셨습니다.
저희 4남매에게도 평생 기집애 새끼 등 언짢은 말 한번 뱉지 않으셨으며,
남에 대해서나 자식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장손이 부원장으로 근무하는 다문화가족센터에서도
텃밭을 그림처럼 잘 가꾸시어 가을 김장에 도움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하는
동남아의 어린애들에게 항상 먼저 다가가 인삿말을 건네셨고
센터의 식당 직원들에게도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자손들과 식당에 함께 가실 때에도 주인이나 종업원들에게
언제나 먼저 웃으면서 인사를 하시고 나오실 때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잘 먹었다는 말씀을 잊은 적이 없으셨지요.
그리고 식당에 손님이 적거나 안 보일 때는
다음 손님들이 들어와 앉는 걸 꼭 보신 후에야 가볍게 자리를 뜨셨습니다.
손님이 없는 식당에는 맛이 없을까봐 선뜻 망설여진다는
일반인들의 심리를 잘 알고 계시므로
약간의 작은 배려를 하실 정도로 마음이 따뜻하시고 여유가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가까운 윤씨 집안에서 가장 오래 장수하신다는 아버지께서는
노인이 오래사는 것은 현대의 큰 재앙이라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임종이 가까워지더라도 병원에 입원시키지 말라고,
만약 장례 때문에 입원하게 될 경우에 절대로 연명치료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의 유언을 하셨습니다.
남들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자식들의 짐을 덜어 주려시고
작은 돌맹이도 능히 삼킬 것 같았던 왕성한 식사량을 서서히 조금씩 줄여 가신 것같았습니다.
수척해지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세 딸들이 걱정하면
늙으면 당연히 식사량이 주는 거라고 위안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몇년 전부터
모시고 사는 며느리는 넷째 딸이라며
시누이인 저희들에게 언제나 늘 며느리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신학대학교수며 목사인 외아들은
그 교단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성서지리학 성서고고학 권위자인데 연례행사인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7,8월 두 달 동안에 세 차례나 떠나게 되었습니다.
20여년 동안 50여차례 이상 다녀 왔다는 것을 잘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마음이 몹시 무겁고 괴로운 외아들에게 잘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걱정말고 무사히 잘 다녀 오라고 하시면서
구십여년 일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감내하고 계셨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거의 초연한 모습을 보여 주셨으나
따로 사는 딸들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아들 순례여행이 끝날 때까지
병원에 입원하시어 링거라도 맞으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일관된 평소의 지론대로 강력히 거부하시며
홀로 死鬪(사투)를 벌이고 계셨습니다.
"만약 아들의 얼굴을 다시 못 보고 세상을 떠난다 해도 냉동실에 계속 누워 있으면 되니
아무 걱정들 하지 말아라 ."
속수무책인 세 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기도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순례를 떠난 얼마 후부터
피골이 상접하신 채 목숨이 자꾸만 경각으로 치닫고 계시는데
8월 17일이 외아들 귀국하는 날입니다
저는 석달에 한번 5박6일의 휴가를 받으므로
8월 14일 부터 19일까지입니다.
둘째딸의 얼굴을 보시고 작은 힘이라도 받으시어야
사흘 후
귀국하는 사랑하는 외아들의 얼굴을 간신히 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자대비하신
불보살님들께 간절히 간절히 기원드렸습니다.
불효했던 제가 아버지를 생전에 뵙게 해달라고ㅡ
또 동생이 귀국할 때까지 살아 계시게 해달라고ㅡ
불보살님들의 가호와 가피로,
남동생의 하나님 사랑으로,
조상님들의 보살핌으로,
우리 아버지의 극진한 자식 사랑으로
우리들 모두의 절실한 기도는 드디어 마침내 기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드디어 14일 휴가가 시작되었고 ,
저는 일산에 도착하자마자
낮 2시에 여동생 가족과 우리 애들과 함께
남양주시 별내의
아버지께로 달려가
금생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눈물을 감춘 채 평온하고도 경건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불효녀인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식음을 전폐하시어
눈도 제대로 못 뜨시고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하시는 아버지께
깨끗한 거즈를 생수를 적셔 입술을 살짝 적셔 드리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동생과 함께 기저귀차신 지 사흘째되시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 드린 것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의 효녀인
우리 언니는 몸이 너무 많이 아파서
전날 형부와 함께 미리 이별의 인사를 드린 처지였습니다.
임종을 앞에 두신 늙으신 아버지 걱정으로
목숨이 타들어 가는듯한
외아들은 성지순례가 끝나가기 직전 모든 귀국 항공편을 여기저기 알아 보았습니다.
마침내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일행과 헤어져 이틀 먼저
단 한 석밖에 남지 않은 다른 비행기를 훨씬 많은 항공료를 지불하고
탈 수 있는 기적이 생겼습니다.
드디어 15일 5시,
평생 아들바라기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超人的(초인적)인 忍耐力(인내력) 끝에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사랑하는 외아들을 다시 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며느리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하루만에
16일 오후 4시 평화스럽게 간절히 所望(소망)하시던 하늘나라로 떠나가셨습니다.
16일 저녁부터 S병원에서 장례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두 개의 화환이 도착했습니다.
제가 15개월 전부터
모시고 일하는 어르신의 따님들이 아주 멀리서 보내준 감사의 화환들입니다.
문상 온 사람들은 모두
구십여평생 언행이 일치되게 살아 오셨던 우리 아버지를 이구동성으로 칭송했으며
우리 4남매는
간간히 흘러 나오는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 누구도 哭(곡)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습니다.
장례가 경건히 끝난 후,
외사촌 오빠와
이종사촌 남동생은
카톡으로 과분할 정도로 우리 아버지를 칭송하는 감사의 글을 보내주었지요.
18일 발인 후 화장장으로 행하는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고
하늘은 매우 청명했으며
우연히도 마지막 정년퇴직하셨던 S초등학교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흡사 路祭(노제)를 지내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장장에서 아버지께서는
1시간 반만에 < 인생무상> < 제행무상>을 알려 주시고 한 줌의 재로 化하셨습니다.
저는 14일~ 19일 5박6일의 휴가기간에
우리 아버지의
장례까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다음날 캄캄한 이른 아침 5시,
3호선 대화역에서 여동생의 전송을 받으며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가서
비행기편으로 곧바로 씩씩하게 일터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자손들 모두의 소원대로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마지막 이별이 순조롭게
기적적으로 이루어졌으니
세상에 이처럼 완벽한 시나리오는 드물 것같았습니다.
우리 자손들은 또다시 우리 아버지의 훌륭한 인품과 생애에 무한히 감격했습니다.
세월이 흐를 수록
4남매의 가슴 속에서
아버지의 빈자리는 점점 더 커져갈 것같습니다.
일평생 무심히 바라 보았던
우리 아버지의 인품과 행동이 그저 당연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매우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의욕만 앞서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어설픈 思父曲(사부곡)을 부르면서
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올곧고 건전한 생각으로 말과 글과 행동이 일체를 이루셨던
우리 아버지께서는
사남매에게 보통사람들이 필요한 삶의 지혜를
말로써 가르쳐 주시고
몸으로 적극 실천해 주신
大器晩成形(대기만성형) 작은 巨人(거인)이셨습니다.
아버지의 산 교육 덕분에
우리 4남매와 그 자손들은
어디에서나 大衆(대중)과 화합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 4남매는
우리 엄마 아버지의 자녀로 살 수 있어서 대단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일생이었습니다.
아버지 서예처럼 그야말로 知足者幸福也(지족자행복야)입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덧붙이는 글>
어젯밤 카톡으로
아버지께
"저 혹시 살아 오면서 경솔한 적 있었나요?" 라고 당돌하게 여쭸습니다.
이 思父曲(사부곡)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以心傳心(이심전심)으로
아버지의 나즈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 영원한 문학소녀야!~ 너는 결코 경솔하지 않았다.
눈물겨운 상황에서도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 신중하게 잘 살았다."
댓글목록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일진행 보살님의 불심 돈독한 지혜와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들을 여러 번 읽으면서
충격을 받아 매우 주눅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
아버지께 드렸던 큰 불효를 떠올리고
용기를 내어 어렵사리 써내려 갔습니다.
여동생은 아버지를 미화시키지 말고 담담히 써달라고 조언을 했었지요.
저는 재주가 많이 부족해서 사실 그대로를 옮기는 일도 무척 어려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영원히 반짝이는 큰 별이십니다.
장황하게 긴 글을 넓은 아량으로 읽어 주신
선재님들께 깊이 정중히 감사드립니다.
음력 8월 초하루 해탈심 합장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그리운 부모님의 사부곡 .지난날의 살아 온 생활을 요. 3년은가야 조금조금 오나가나 떠오르고 눈물나고 ...하더이다. 건강 에신경쓰시고 착한 마음 잘 정리하시어 남은 인생에 날마다 좋은날로 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원만행 앉으나 서나 염불 하세요. 약사여래불.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원만행보살님!~
교육자이셨던 아버님을 여위신 지 오래 되었으니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 것같습니다.
오늘 초하루라서 많이 바쁘셨지요?
보살님의 덕담처럼 우리들 모두에게 좋은 날이 항상되기를 기원드립니다.
포교당에서 맹렬 정진수행하시는 보살님이 매우 부럽습니다.
가장 빠른 댓글 감사감사드립니다.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진여화님의 댓글
진여화 작성일
효녀중 효녀로고
나무대원본존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진여화 총무님!~
단 한 줄의 댓글이 이토록 저의 마음을 크게 울릴 줄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여러 번 아주 큰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미친 연애와 헤어짐.
백발 노파가 되어서야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아버지께 두번의 아주 작은 효도를 했습니다.
첫번째는 몇 년전 밀운행보살님과 안면암 사무실 봉사를 할 때 받은 보시금을
두 달 동안 50만원씩
먼저 돌아가신 엄마와 살아 계신 아버지께 드린 것입니다.
마지막 효도는 15개월 동안 아버지께 월급을 탈 때마다 즉시
20만원씩 용돈을 입금시킨 것입니다.
그 거대한 행복감은 이미 아버지 별세 후 영원히 실종되고 말았지요.
진여화 총무님의 과분한 극찬에 어린애들마냥 들떠 버려
쓸데없는 수다를 떨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과분한 칭찬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가슴을 울려주는 사부곡입니다.
훌륭한 문장가로 잘 자란 효녀의 글을
선친게서 기꺼워하실것입니다.
경솔하면 실수하고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게 된다
라고 가르치신 어른의 뜻을 저도 받아이어 명심하려합니다.
아버님의 일대기를 남매분들이 각자 써서
후세에 본이 될 책으로 엮어 남기시면 좋겠습니다.
나도 새삼스럽지만
우리 모두의 스승이신 윤 교장님께 애도의 뜻을 올립니다. 오선주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존경하는 오선주 보살님!~
과분한 극찬에 부끄러워 저 자신을 다시 되돌아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무척 평범하게 사신 분이지만
자신을 충분히 지키고 다스린 분이셨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아버지 일대기는 저희들 능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하지요.
최고의 지성인이시며 문장가이신
오선주 보살님의 과찬에
우리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시며 무안해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 사후에 베풀어 주셨신 지극한 성심과 후의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저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평범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
최고 최대의 찬사인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 지칭해 주셨습니다.
보살님이시야 말로
문수보살님의 지혜와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를
구족하신 이 시대의 진정한 보살도 수행자이십니다.
감사드립니다.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ㅇㄷ님의 댓글
ㅇㄷ 작성일
할아버님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이 뭔가요?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할어버지께서는
무슨 음식이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골고루 다 잘 드셨어요.
식성이
금메달감이라고 ㅡ
특히 생선, 면 종류를 아주 좋아하셨어요.
관심의 댓글 고맙습니다.
이삼순님의 댓글
이삼순 작성일
성인군자 교장선생님
우러러 존경합니다.
해탈심 보살님의 효심, 그 깊이와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네요.
그 아버님에 그 따님이겠지요.
현인 아버님 명복을 빕니다.
문수화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문수화 이삼순보살님!~
저희 아버지께서는 성인군자도 현인도 아니십니다.
그러나
보살님의 이 극찬의 댓글을 보시면 부끄러워하시며 感之德之(감지덕지)하실 것입니다.
옛부터 부모님 애먹인 놈이 효도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효도는 아니지만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
동물에 대한
대자연에 대한 사랑을 닮고 싶을 뿐입니다.
일교차가 심하여 날씨가 약간 쌀쌀해졌습니다.
다음 안면암 포교당 법회에서
보살님과 사장님 두 분을 뵐 때까지
부디 아무쪼록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연꽃처럼 아름다운 마음의 댓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일진행님의 댓글
일진행 작성일
스쳐지나간 작은 인연도소중하게 바라보시고 , 작은 몸체 반려견에게서 선재동자의 몸짓과 구도행의 자비에너지 눈빛을 찾아내신 해탈심은 서산대사의 오도송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 사람, 사람.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 천국이 따로 없네, 극락이 따로없네^ 깨달음을 이미 실행하고 계신듯 합니다.
고뇌를 낳는 근본으로서의 무명을 멸함으로서 해탈의 도가 달성된다고 가르치시는데, 우리에게 여실지견의 지혜를 깨우칠 날이 언제 오겠습니까?
그런데, 해탈심은 아마도 옛적부터 서산대사의 *해탈시*를 몸과 영혼속에 간직하고 음송하면서 살아가시는 보살행의 선두주자인 것은 틀림없는 것이지요.
해탈심이 알려주시고 들려주시는 안면암 게시판의 범종울림은우리 안면암 신도들에게 심어주는 마음속 불심의 향기이고 연화가되어 감동의 파장으로 울려 퍼집니다.
이 번 해탈심의 사부곡은 세상의 혼탁한 욕심에만 자극되고 물들여져서 서로 바라보기 민망한 세상의 진애 속에서, 한없이 솟아나 넘치게 불어 넣어주는 생명수의 원천이 되어 주셨던 선친에 대한 사랑이 자녀된 사람을 통하여 분수처럼 내뿜어지는 효도의 노래였습니다.
이 글을 접하신 안면암 도반 모두 뿐만아니라 , 인연이 있어서 이 지면을 방문하실 많은 분들 가슴에 자녀에 대한 사랑을 교육으로 , 모범행실로 , 빛나는 자부심과 사랑의 열매로 보여주는 교본이 되어 해탈심의 선친께서는세상을 정화하고 혼란한 정신을 평상심으로 이끄는힘이요 교육의 효과로 오래도록 나타내실 것입니다.
서산대사의 * 해탈시* 를 한 번 접해보아야 할 불심의 연기가 돌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시었기에 석 지명 큰스님이 우리 안면암 도반들의 큰 스승으로 자리잡으시고 , 이러한 인연이 우리 안면암 같은 지붕아래서 고뇌를 나누고 기쁨을 함께하는 한 연못속의 연화가 된 것을 감사하게 느끼고 삼배합니다.
삶은 내 것이라 하지말고 잠시 머물다가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지만, 그래도 우리가 한 번 다니러 온 이 생애에서 부처님의 가르치심과 해탈을 향한 불심의 목표를 같이 이루어 보려는 도반들이 옆에 같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와 안심이되고 힘이 됩니다.
해탈심 혼자 너무 앞서서 뛰어가지 마세요. 손잡고 같이가요. 나같은 사람 숨차요!
불기 2564 년 한가위를 앞두고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일 진 행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일진행 보살님!~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문수보살님의 지혜로 시원한 감로수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들 큰스님께서
하근기의 해탈심에게 게시를 부탁하셨을 때
세리 송을 읽어 보고
거의 開眼(개안)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번도 저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없는
보살님과 좋은 도반이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었지요.
우리 아버지와 저는 그저 자기가 서있는 곳에서 당당하고 따뜻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입니다.
또한 안과 밖이 똑같아야 한다는 중생계 간단한 이치를 실천하려 애쓴 보통 사람이기도 하구요.
서산대사님의 <解脫詩(해탈시)> 와는 하늘과 땅 사이입니다.
불심과 지혜가 매우 모자란 해탈심이
성역인 자유게시판에서 나름의 글봉사를 하는 것은
안면암 불보살님과
석지명 큰스님
설봉스님께 입은 크나큰 자비를
빙산의 일각이나마 덜고 금생을 마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세생생에서 지은 두터운 업장을 지워내기 위한 최선책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작으마한 티끌만한 선근이라도 심어야 언젠가의 미래의 생에서
#아라한 果(과)라도 오르게 되리라 믿습니다.
일진행보살님의 수승한 지혜의 댓글을 보며
자칫 게을러지려는 신심을 바로잡겠습니다.
인연따라 불연따라
자유게시판에 왕림하시는 우리 모두는 다같은 도반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보다
정신과 영혼이 소통하는 분들과의 인연과 불연은
깊고도 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세리 선재동자님은
저에게 아주 좋은 도반을 선물해 주고 적멸보궁으로 날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에게
딸을 떠나보낸 슬픔과 고통을 승화시켜
옛날처럼 엄마의 돈독한 불심과 뛰어난 재능을 자유게시판에 보시하라는
숙제를 남겼다고 굳게 믿습니다.
보살님처럼
자유게시판을 아끼시며 글보시하셨던
기라성같은 수많은 선배 보살님들께서
한분 두분 계속 복귀하시어
자유게시판의 르네상스가 되기를
불보살님 전에 간절히 빌겠습니다.
가장 긴 <롱다리>의
일진행 보살님께서는
숨차다고 애교의 유모어를 보여 주셨지만,
가장 짧은 <숏다리>의
해탈심은 금세 발병이 나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불심깊은 안면암 도반님들과
따뜻한
두 손을 잡고 보조를 맞춰 천천히 걷다 보면
우리 다 함께
멀지 않은 또다른 생애에 피안의 언덕에 반드시 오르리라고 확신합니다.
왜소한 해탈심을
마냥 부끄러워하게 만드시는 댓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리 선재동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베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불기 2564년 초가을에
★지장대원탑 점안식을 학수고대하며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저녁 예불 시간에 쫒겨
키를 잘못 눌러 이번에도 댓글이 산산조각 공중분해될 줄 알았다가
부처님 가피로 간신히 살아 남았습니다.
오! 오!!~~
사바세계 일체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해탈심 합장
정광월님의 댓글
정광월 작성일
효자 딸 두신 아버님
글 잘 쓰고
안면암을 위해 봉사하시는 해탈심 보살님의 아버지를 향한
마음 저는 못해요
건강하셔요
해탈심게시봉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탈심게시봉사 작성일
정광월 보살님!~
극심한 허리통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시면서도
댓글 주셨습니다.
저는 효자가 아니며 한번도 효자라고 생각해 본 적없습니다.
그저
부모님과 소통하고 교감했던 엄연한 진실들을 서툰 글로 옮겨 봤을 뿐입니다.
추워지면 모든 통증을 더 심해지는 법이니
어서빨리 건강 회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입니다.
감기 독감 코로나19에서 건강 잘 지켜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