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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 남은 날들도 늘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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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주게시대행 댓글 21건 조회 291,643회 작성일 20-03-16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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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은 아름다워


돌이켜 보니 가난한 것이 슬픈 것 만은 아니었다.

동경에서 태어난 나는 1946년 5월 11일, 경북 영양에 있는 아버지의 고향 집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아침상에 오른 것은 쌀알은 보이지 않고 불구스레한 송기(松肌)가루와 일본이 강탈해 간 쌀 대신 만주에서 들여와 배급해준 콩깨묵으로 채워진 밥그릇이었다. 반찬은 산에 막 싹이 튼 산나물들을 뜯어다 삶아서 간장으로 무친 것 하나 뿐이었다. 나는 도져히 먹을 수 없었고, 점점 야위다가 온 얼굴에 죽은깨가 가득 솟았고,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 살 위 사촌 언니가 나를 데리고 강가 자갈밭에 나가 무성하게 덩쿨을 이룬 찔레 숲에서 새 순 꺾어 먹는 걸 가르처 주었다. 땅에서 솟아나 15cm 정도 자란 것 중에서 통통하게 물 오는 것을 꺾어서 먹곤 했다. 덤불 속에 손을 들이밀어야 찔레 순이 손에 잡히기 때문에 손등은 가시에 굵힌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는데도 그 시원한 주스 때문에 강변에 살다 싶히 했었다. 강변 넓직한 바위 위에 누워 파란 하늘에 두둥실 흘러가는 힌구름을 바라보았던 그 시절을 아련한 그리움으로 회상한다. 양치할 치약도 치솔도 없어서 학교 가는 길에 건너는 돌다리 밑에 고인 고운 모레 한움큼 퍼 들고 인지 손가락에 모레를 발라서 입속 구석구석을 문질렀다. 모래양치할 때마다 콧끝에 살짝 맺혀 있던 골벵이 비린내가 지금도 후각을 스치는 듯한 착각을 가끔 하곤 한다.


나의 아버지는 선각자셨다고 믿는다. 다시 있을 수 없는 가난 속에서 나를 학교에 보내주셨다. 집안 어른들이 식구가 밥 굶는 판에 딸아이 학교 보낸다고 성화를 하셨다. 아버지는 나를 중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새집 지우려고 선산에 자란 나무를 베다가 다듬어 둔 석가레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다. 여름에는 물론 초겨울 무서리가 내린 날도 맨발로 등하교 하였다. 발바닥에 굳은 살이 베겨도 고생인 줄 몰랐었다. 여자도 교육 받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소신이 나의 평생을 보장해 주셨다.

 

<딱 한 글자>의 恨이 있다. 지금도 아쉬워 꿈결에서조차 분해하는 사건이다. 중학교 국어담당 鄭輝滿선생께서 三一獨立宣言書를 칠판에 쓰시고 나서 누가 읽어 보라 하셨다. 여학생 20명에 남학생 40명으로 60명 중에 아무도 손 드는이가 없었다. 나는 딱 한 글자를 몰라 손 들지 못하였다. "선생님, 한 글자를 모르는데 읽어도 되겠습니까"라고 여쭈어보지 못한 恨이 크다.

진실로 아쉽고 억을한 기억은 따로 있었다. 고교 진학을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부설 양잠교사 양성 과정에 학생 모집한다는 공고가 있었다. 영양군수의 추천으로 입학하고, 3개월 교육기간이 끝나고 졸업시험이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農大 李 모 교수가 칠판에 뭔가를 가득히 쓰고 나서 읽어보라 했다. 이 때 역시 딱 한 자를 몰라 손들지 못했다. 그런데 그 교수의 뜻밖의 말이 떨어졌다. 이걸 읽지도 못하면서 이미 모든 학과에서 최고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학생은 컨닝 한 것이 틀림 없다고 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억을하다. 내 한문 실력은 스스로 생각해도 또래의 수준을 넘고 있었다. 후일 법학을 전공하면서 <의심스러운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 in dubio pro reo>를 배우고 나서 그 때 그 李 교수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다. 법대 교수가 된 후에도 이 사건은 내게 반면교사로 남아 학생들을 우선 믿고, 격려하기를 먼져하게 되었다.

위 언급 양잠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 행운의 열쇠가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당시 경북도청 내 별관에 미국의 한국전후복구지원단이 상주하고 있었다. 약식명칭은 KCAC 였다. CAC의 경제과장은 한국농촌 경제부흥을 위해서 다방면으로 지원하고 있었는데 한국산 Silk의 품질이 우수한데 착안하여 누에 치기를 장려하면서 養蠶학교에 자주 강의하러 왔다. 이 때 통역인이 후일 내무장관을 거쳐 주일본대사를 역임한 嚴敏永교수님이었다. 엄민영 선생님과 당시 申鉉敦 경북도지사가 나란히 추천해주어서 CAC의 장학금을 받게 되어 나는 경북여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어수룩한 시골뜨기에 지나지않았지만 두번째 학기에 우등생이 되었고 다음 학기에는 大望의 特對生이 되었다.

이화여대 법대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신학 철학 법학 의학 경제학만이 진정한 학문이고 다른 분야는 예술이거나 기술이라고 보셨다. 고3 여름방학 때, 교통사고로 입원한 딸을 넉달씩이나 간병하신 어머니가 의학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법학을 택했었다. 法解析學은 나의 기질에도 맞는 것 같다. 존경해 마지 않는 李英燮선생님의 민법총론 강의를 즐겼고, 李太熙학장님의 형법강의도 열심히 공부했다. 이영섭 선생님은 여자는 혼기라는 것도 있어서 고등고시에 도전하는데는 한계가 있으니 외국어 하나를 깊이 공부하라 하셨다. 대학원 졸업 후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영어통역관으로 사회 첫출발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영섭 선생님의 先見之明 덕택이었다.

설흔 둘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강원도 천석꾼으로 이름 난 집 둘째 아들이었는데, 시어머니는 아들은 금싸라기로 키웠고, 서울 법대 나오고 옥스포드 유학한 것을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셨다. 그런데, 며느리는 한강 모레알을 먹고 자란 여자 정도로 여기셨고, 며느리가 그 당시 드믄 석사 출신이란 것은 안중에도 없으셨다. 아들 딸 각 하나씩 얻은 것이 내 인생 최고 최대의 축복이다. 아들은 단란한 가정을 꾸렸고, 며느리는 아이 셋을 낳아 기르는 사이 인간적으로 훌쩍 성숙해졌다. 딸은 시카고대학교 박사학위 받았고, 관련학과 교수가 되어 자랑스럽다.

그 앗찔한 순간이 떠오를 때면 지금도 숨이 멈춰버릴 것 같다. 70년대 초에는 서울 시내 버스 거의가 남대문시장 앞에서 섰다. 언제나 버스로 연결된 기차 정거장 같은 곳이었다. 시장이나 백화점에 가는이 들은 여기서 줄줄이 내렸다. 다섯살 된 아들을 먼져 내려주고 내가 내리려는데 버스가 문을 열어둔체로 슬슬 가더니 아예 달리기 시작한다. 나는 기사를 향해 차 세우라고 소리소리 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기가 혼자 저기 있다고 발악을 쳐도 버서는 달려갔다. 보다못한 승객들이 가세해서 정지하라 소리치니 기사가 마지못해 차를 세웠다. 나는 미친듯 뛰면서 아이를 찾았다. 얼마나 달렸는지 사람들이 빙둘러선 곳을 보니 내 아이가 하늘을 치받듯 길길이 뛰면서 울고 있었다. 아이를 안기는 커녕 그 자리에 털썩 주져앉아 겨우 "진우야~~~" 소리쳤지만 내 쉰 목소리는 온갓 소음에 뒤썩여 묻혀버렸다. 짐승처럼 기어가서 간신히 아이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결혼 후 再起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李效再 선생님의 추천으로 자원봉사 단체인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원이 되었다. 다음 해,1974년 봄, 미국국무부와 미국여성유권자연맹 해외교육재단의 공동초청으로 3개월간의 아세아여성지도자육성 세미나에 참가하게 되었다. 풀뿌리 민주주의 사상은 新鮮하게 들렸다. 이 교육에 참가한 빚-도의적-을 갚기위해서 나는 연맹 일이라면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봉사하였다. 가치관의 차이와 오해 등으로 인간 관계가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매우 값진 나날이었다.

비록 NGO 활동이 사회적 기여가 크다고는 해도 내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였다. 가족법학자 배경숙 교수가 덕성여대의 <여성과 법률>이란 강좌를 물려주셔서 열심히 강의하였다. 5년에 걸친 이 경력이 바탕이되어 청주대학교의 교수직에 오를 수 있었다. 첫해는 잠을 거의 않자고 죽기살기로 공부하며 강의 준비에 몰두하였다. 형법의 그 역사적 사상적 이론적 배경을 이해하고 터득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첫 강의에 나갈 때 金鍾源선생님께서 나를 종로서적으로 데려가셔서 일본 吉川經夫(기쯔가와 쯔네오)교수의 刑法總論을 사주시면서 강의 준비하라 하시고, 1982년에 그 분은 직접 박사학위 지도교수가 되어주셨다. 金교수님은 하늘이 내려주신 나의 평생의 은인이시다.

내가 청주대학교로 첫 출근하는 1981년 3월, 어머니는 노환으로 매우 쇠약해 계셨다. 기억력마져 희미하신데도 나를 오라 손짓 하시고는 치맛속 호주머니에서 돈 6만원을 꺼내주셨다. 당시 남편이 하루아침에 역사에 남은 <해직 교수>로 직장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정신적 혼란에 빠지셔서 내게 차비가 없을 것을 염려하신 것이었다. 그 당시는 나도 정신없이 받아들고 청주로 향했었는데... 지금은 가슴을 애이는 슬픈 기억으로 남았다. 이 불효 보다 더 큰 恨은 없다.

청주에 가보니 나는 청주대 법학과의 첫 여성 교수였다. 한국 나이로 마흔여섯의 내가 동안이라 나이보다 더 어리게 보인다고들 했다. 학생들 특히 군대 복학생들은 모두 영감처럼 느껴졌다. 강의 준비하느라 화장은 커녕 세수조차 변변히 못하고 다녔는데도 나를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학생이 많았다. 학생들을 의식해서 의복이며 구두 등 조신한 차림새로 다녔는데도 가끔씩 날라오는 戀書에 정신이 뻔쩍 나서 강의 외에는 학생들과의 대화조차 삼가하였었다. 내가 나이들고 학생들과의 나이 격차가 벌어지면서 이런 민망함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헌법에 "姓別에 의하여 차별 받지 아니한다"고 兩姓간 평등이 보장된지가 30 몇년이 지나고 있었음에도 남자 교수들, 명색이 법학한다는 분들의 여자 차별 분위기가 법대 안에 은근히 깔려 있었다. 이 바이러스가 차츰 줄어든다 했더니 내가 청주대 역사 50년만의 첫 여성 학장이 되었을 때, 타 대학 교수님들 사이에서는 축하일색인데 정작에 법대 내에서는 상식 이하로 반발하는 두 교수가 있었다. 나는 극단적인 견제를 이겨내면서 업무 수행에 정성을 다하였다.

교수 생활 외에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었다. 李元鐘 충북지사는 각종 위원회에 나를 불러 주었다. 행정심판위원회, 충북지방노동위원회 심판담당 공익위원, 충북분쟁조정위원회 위원장 등등의 회의에 참여 할 때는 청주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이 컸고, 충북지역 名士들과의 친분도 쌓게되었다. 李지사님과는 지금도 그 시절의 신뢰와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무사히 정념퇴임을 맞이하게 된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權泰鎬 검사장을 비롯한 나의 박사 제자 여덟 명이 나의 정년 퇴임식식을 준비하면서 퇴임 기념 논문집 발간도 기획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석학 鄭盛根교수님께서 몸소 발간 위원회 회장을 맡으시면서 珠玉같은 논문 51편이 모여 학계에 공헌할 논문집이 발간되었다.

정년퇴임식은 모두 애써주신 덕택으로 성대히 진행되었다. 기대 밖으로 역대 형사법학회 회장들이 두 분만 못오시고 은사님을 비롯하여 모든 분들이 멀리 청주까지 왕림해 주셨다. 이보다 더 감격스럽고 영광스런 일이 평생에 다시 없을 것이다.

23년을 봉직한 교단에서 내려와 앞일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 한국항공대학교 법학과에서 형법담당 겸임교수 발령을 받았다. 퇴임하는 나를 위하여 민법 金選二교수가 자리를 마련해 둔 것이다. 뜻밖의 배려에 감동했었다. 이화여대 민법 崔錦淑교수는 대학원 학생들을 위한 원서강독 강의를 의뢰해 왔다. 교재로 삼은 동경대 大村 敦志(오오무라 아쯔시)의 民法總論을 8년간 강의하면서 나는 그의 해박한 민법이론에 심취했었다. 또, 여성개발원에서는 국제교류 원활화를 위하여 간부급 직원들에게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나에게 일본어 회화 강좌를 배당해주었다. 대학 교수직 수행 때보다 더 바빠져서 세월이 많이 흘러가는데도 늙는줄도 모르고 일을 즐겼었다.

청주 법대에 언제부턴가 81학번 崔秉錄군을 중심으로 <오선주를 사랑하는 모임>이 구성되고, 오사모 회원들은 지금까지 나를 女王처럼 받들어주고 있다. 해마다 스승의 날에 잔치를 열어주다가, 2014년에는 81*84 학번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고, 여덟 명의 박사 모임인 <刑友會>가 맞들고, 청주 법대 여학생회장 출신들이 자진 참여하여 나의 팔순 잔치를 화려하게 열어주어 나를 감동케 했다. 청대 역사에 전무 후무한 일이라 한다. 내가 청대에 취임하기도 전에 법대를 졸업한 吳顯鎭명예교수는 내가 120세 될 때까지 매년 나의 생일 잔치를 열겠다고 公言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애교쟁이 회원이 냉큼 이를 녹음 녹화하였다. 吳 회장은 財福이 큰데다 마음씀새도 넉넉하시니 이 행운은 절대 꿈이 아닐 것이다.

나의 인생 제2막의 길이 열렸다. 허공장 釋之鳴대선사와의 만남이다. 하숙생 같았을지라도 33년을 함께 한 남편에 대한 의리로 그의 명복을 빌러 속리산 法住寺에 갔을 때 처음 뵈었다. 巨軀이신 스님의 낭낭한 음성으로 불경을 奉頌하시는 모습에 敬畏心이 일었다. 스님은 1960년대에 드물게 미국 템풀대학에서 Ph.D를 받으신 學僧이시다. 스님의 모험심과 개척 정신이 남다르시다. 조선일보 명칼럼니스트 李圭泰 선생이 "신라 불교사상의 재현"이라 극찬해 마지않은 일엽편주 북태평양 황단항해는 스님의 모험심 발현의 극치였다. 천수만 바닷가 언덕 위 황무지에 安眠庵이 창건된 것도 스님의 개척정신에 의해서 가능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스님이 인솔하시는 해외 불교 성지 순례가 거듭될수록 안면암 중생들의 佛心을 깊게 하였다.


스님 하명으로 붓타의 涅槃圖를 그리고, 진천 영수사에 모셔진 보물 제1551호 靈山會괘불탱을 3년 여에 걸처 模寫해 낸

것은 佛恩이었다. 스님 모신지 어언 20년, 헤아릴 수 없는 감화와 감동을 받으며 스님의 불자된 인연에 감사하고 있다.


필사해 두었던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안면암 地藏大願7層大塔 상륜부에 복장하게 되어 그 기쁨 한량 없다. 앞으로 복장할 光明眞言등을 여러 벌 필사하면서 작은 정성으로 스님의 無量光壽를 빌었다.

천수만 潮流가 멈춘 곳, 보름달이 휘엉청 밝은데 금빛 파도가 잔잔히 빤짝이는 황홀경을 보면서 난생 처음으로 그런 낭만을 누렸다. 피아노 음율로만 상상했던 그 金波가 눈앞에 춤추고 있다. 영혼마저 취한 듯 船窓 가에 앉은 채로 새벽을 맞이했다. 지명 스님께서 남겨주신 이 아름다운 추억은 아스라히 꿈결 속에서도 여울져흐른다.

지난 날들을 정리할 시점에 이르렀다 여겨 써놓고 보니 미니 自敍傳이 되었다. 놀랍게도, 젊은 날에 겪은 좌절감이나 저주하고싶을만큼 원망스런 것들이 거의 잊혀지고 있었다. 나이 듦에 따라 성숙해진 덕일까. 불교에 귀의한 후로 부처님의 智慧와 慈悲를 깨달아가기 때문일까. 相互 고르게 작용하고 있을 것 같다.


내 인생, 참으로 아름다웠구나 !


남은 날들도 늘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삶이 다하거던 祥瑞로운 구름이 되어 온세상에 단비를 뿌리게 하소서.


2020. 03. 16. 오선주 (吳 宣 妵)


댓글목록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참으로 오래 살았습니다. 그간 저를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이 계심에도 글이 너무 길어져서 다 일일이 감사의 뜻을 올리지 못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이 80에 들면서 이제부터 덤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  내 삶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쓰다보니 기쁨과 슬픔등이 모두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나를 사랑하여 주신 모든 분들께서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오선주 합장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존경하는 오선주 보살님!~

오직 자신만의  형설지공으로 이뤄내신 빛나는 공적이십니다.

자서전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모두 경의와 찬탄을 바치게 될 것 같습니다.

여성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코 세세생생의
공덕이 대단히 크셨기에
금생의 찬란란 업적을 이루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저같은 이른바 흙수저도
보살님과 함께
석지명 큰스님의
신도가 될 수 있어 크나큰 행운입니다.

부디
건강히 120수 하시어
안면암 홈피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석원영 합장님의 댓글

석원영 합장 작성일

행복하신  교수님
학문에 매진 할 수 있으시고
외국어에 능통하시고,한자도
건강하셔요
감사드립니다
안면암 홈피  빛나게  해주시고
손녀도  세명
아드님 ,따님  잘  키우셔서요
경영학  하면 시카코대
저의 대학  은사스님  아들도  시카코대
교수님께선  학문에 여한  없으시겠네요
존경합니다

              석원영  드림

소양자님의 댓글

소양자 작성일

오선주대보살님, 짧고 , 행복하시고, 아름다운 자서전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잘 사셨습니다. 앞으로도 150살 까지만  사세요.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독일의 자연심합장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석원영 보살님! 보잘 것 없는 글, 좋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싶어 쓴 글인데 공개하기엔 부끄러운 일도 많은 글이어도 어딘가에 남겨두고 싶었답니다. 늙어가면서 염치가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앞으로 더 오래 살게 된다면  참회록 같은 것 쓰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로나 조심하세요. 건강 잃으면 모두 소용 없습니다.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을 껴안고 눈물 흘리신 동영상을 얼마 전에 보았습니다.  그 시절에 나도 뉴스에서 시청했었던 역사였는데,  이 번에 나온 동영상 보고 나는 소리내어 울었어요. 눈믈을 쏟아내지않으면 가슴 속에 응어리가 생길 것 같았어요. 가난을 이겨내려고 애쓴 우리 모두 애국자였어요. /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해탈심 보살님! 항상 과분한 말씀이 부끄럽고 민망합니다. 그런 칭찬 듣기에는 아직 한 세상 더 살아야할 것 같습니다. /  보살님의 게시대행 공덕이 큽니다. 또한, 안면암 대소사를 모든 불자들에게  눈에 본 듯 전하시는 공덕이 큽니다.  항상 부처님의 가피가 있기를 빕니다.

一語成讖님의 댓글

一語成讖 작성일

오선주 보살님의 글을 주욱~ 읽다 보니 저도 모르게 옛생각이 새록새록 나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그래서 그 옛생각과 지금 생각을 두서없이 주저리주저리 몇 가지 나열해볼까 합니다.
그에 앞서 우선 오선주 보살님의 글에 한자(漢字)가 약간 섞여 있는데, 다행히 오선주 보살님의 배려이신지 모르겠지만 모르는 한자는 한 글자도 없어서 읽는데 어려움은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ㅎㅎㅎ


몇 가지를 나열해보면....


첫째, “돌이켜보니 가난한 것이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는 말씀은 역경(逆境)을 이겨낸 분이 하실 수 있는 깨달음의 말씀일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또한 금강경(金剛經)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역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생을 허비한 사람은 쉽게 동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둘째, 어린 시절에 송기(松肌)가루와 콩깻묵으로 채워진 밥그릇에 이르러서는 보살님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웅변(雄辯)하고 있다고 할 것인데, 보살님의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 어렴풋하게 떠오르면서 한편으로는 살짝 반가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송기’라는 단어 자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시절에서 송기라는 단어를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은 반가움이라고 할까요?

또한 저는 송기가루는 못 먹어보았지만, 같은 소나무의 산물(産物)이라고 할 수 있는 솔잎과 송진가루는 먹어보았기 때문에 어쩌면 약간의 동류의식(同流意識?, 불쾌하셨다면 海量하시기 바랍니다)이 생겨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솔잎을 먹게 된 동기는 솔잎을 먹으면 허기를 잊게 해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데,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했습니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린 후에는 솔잎을 먹고 싶어도 못 먹고 있습니다.

깻묵도 콩깻묵은 아니지만 다른 깻묵은 먹어보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깻묵먹기를 매우 좋아 했습니다만, 당시 제가 살던 곳에서는 깻묵구하기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어서 매우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으며 지금도 가끔 그때의 그 고소한 냄새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셋째, 모래양치 부분은 반가운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고 슬픈 생각만 듭니다. 어렸을 때부터 모래양치를 하셨다면 치아마모(齒牙磨耗)가 심하게 되셔서 그 뒤에도 치아 때문에 고통이 많으셨을 거 같은데 요즘은 어떠신지요?

저 같은 경우는 모래양치 경험은 없습니다만, 소금양치를 조금 했었는데 그때 너무 심하게 하여서인지 치아마모가 심하게 되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습니다. 요즘은 꾀가 생겨서 2년 전부터 소금을 물에 녹여서 소금물로 양치합니다. 치약에 미세플라스틱이 첨가되어 이 미세플라스틱이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넷째, 교육에 있어 아들과 딸에 차별을 두지 않으셨던 보살님의 아버님께 경의(敬意)를 표함과 동시에 그런 훌륭하신 아버님을 두신 보살님의 복(福)이 보살님의 복으로 그치지 않고, 후생(後生)들의 복으로 길이길이 복승(福勝)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남녀평등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오선주 보살님의 아버님의 남녀평등의식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보입니다만, 제 생각에는 이것도 남녀평등의식과 관련된 듯싶어서....

제가 알고 있는 분 중에 대법원장을 역임하신 분이 있는데, 이 분의 판결 중에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남녀평등에 입각한 판결이 더러 있었고 당시 메인 뉴스에 보도가 되기도 했던가 봅니다. 그런데 이 분의 장인 장모가 돌아가시자 처갓집의 유산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렴강직하게 지낸 분이라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는데도, “내가 이만한 지위(당시에는 대법원장은 아니었고 대법원 판사였던 거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음)에 있는데 무슨 처갓집 재산을 받겠느냐”는 식의 말씀을 하면서 부인에게 유산 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처갓집 식구들이 경제적으로 특별히 어려운 사람은 없었습니다만 결국 부인은 상속 포기). 당시 제가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이 분의 남녀평등의식은 어떤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던 생각이 떠오르네요. 여담입니다. ㅎㅎㅎ   
 

마지막으로 보살님이 보신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과 관련한 동영상이 제가 본 동영상(KBS)과 같은 동영상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막연한 느낌상으로 같은(어쨌든 비슷한 내용의) 동영상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KBS 방영 당시에 우연히 보았던 것으로 기억되며, 그 동영상을 보면서 저 자신도 모르게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려 내렸던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오선주 보살님이 흘리신 눈물과 제 눈물은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것이었을까? …… 저의 의식은 깊은 수렁 속으로 침잠해 들어갑니다.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一語成識님! 
길어진 글 끝까지 관심 있게 읽어주신데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을 경험하신 것을 토대로 하여 쓰신 글로 짐작컨데 나보다 한 10년 후세대로 사시는 분 같이 느껴집니다.
네. 치아 마모로 치과에 자주 다녔고 그래도 흔적이 남아 흉했는데, 효자 아들이 첫 월급 받은 돈으로 깨끗이 재생시켜 주었습니다. 
처가 유산 포기한 대법관은 누구신지 궁금합니다. 나의 이화여대시절 은사이신 이영섭 선생님은  대법관으로 18년 일하시다가 마지막 2년을 대법원장 직을 수행하셨습니다. 그 분의 청빈을 존경하였고, 누가 사건에 대해서 물어보면 "판결이 말해 줄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시고, 사건 당사자의 오해를 받을까봐 친척 간의 왕래조차 엄히 다스리셨던 분이십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존경 받으시는 대법관이셨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그 분의 퇴임사를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一語成讖님의 댓글

一語成讖 작성일

제가 그 분의 사적(私的)인 내용을 언급했으므로 함자(銜字)를 밝히지 않음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불법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불사(佛事)에도 참여하시니 홍복(洪福)이십니다.

석원영님의 댓글

석원영 작성일

해탈심  보살!
대단하십니다
자유자재로
댓글 순서도
바꾸시고


아파 공부 못한것이
지금도  그런데
부럽습니다
홈피 관리하는 솜씨가요
그렇게 댓글쓰는  순서가
중요하다고
느끼 시나요
저는 의리상
댓글 다는데
순서를 바꾸시면.,.

다 댓글 시간이 나오는데,..

그 의리란
큰스님에 대한 예의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정광월 보살님!~

제가 무슨 재주로 다른 분의 글에 손을 댈 수 있나요?
홈페이지 운영 방식이 달라져서
전과 전혀 달라 더욱 어렵습니다.

저는 아직도  컴 초보자인 셈이라
거의 똑같은 일만 반복하는 얼치기입니다.

특히 가장 고마워하는 보살님께
그런 무례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비밀번호도 모르고
안다 해도 설사 그런 잘못을  저지른다면
불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너무 속상하고 궁금합니다.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정광월 합장님의 댓글

정광월 합장 작성일

삭제  하려고
다녔는데요
안 되데요
해탈심  보살님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하셔요
  정광월  합장

ybr님의 댓글의 댓글

ybr 작성일

정광월보살님!~


비록
온라인 상이지만
어느 누구라도
자기 글을  다른 이가
일부러 삭제했다면
대단히  불쾌할 것입니다.

저는 겁이 많아 완전 운전맹이어서
컴 스마트폰 등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애들에게 묻고 또 물을 때마다
그것도 모르냐고  가끔 잔소리를 듣지요.

우리가 나이가 많아
새로운 것의 습득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불교 특히
큰스님  저서에 관심이  많으신
보살님을 통해
아주 소중하고 귀중한 정보를
접할 때마다
감사함이 무척 컸었습니다.

그동안 
저같은 안면암 늦깎이 신도에게
따뜻한 시선과
정성어린 선물을 항상 베풀어 주셨던
보살님께
불보살님과 신장님들의
가호가
언제나 늘 함께하기를 기원드립니다.
 
              나무대원본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약사여래불 해탈심 합장

T. H. 권님의 댓글

T. H. 권 작성일

글자 수로만 봐서는 미니 자서전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메머드 자서전입니다.
주옥 같은 자서전 내에서 다양한 삶의 여러 고비를 지혜롭게 극복하신데에 경의를 표합니다.
표제처럼 잘 사시게 되실 것입니다.

오택진님의 댓글

오택진 작성일

누님! 안면암 홈피에 실은 미니 자서전 잘 읽엇습니다.
함축적인 글 속에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가난의 세월.
선각자이신 아버님 덕에 공부하시게 된 것도 누님의 홍복입니다.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T. H. 권 님!
네. 이 압축된 글을 욕심 껏 풀어 쓴다면 열권 정도의 분량이 되겠습니다.
만약 내가 미수(米壽)까지 산다면 시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 때 쯤에는 참회록에 가까워질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시고 귀한 답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원만행님의 댓글

원만행 작성일

암도 백양사주지  스님  법문을 티비에서 접했읍니다.  부처님공부는 80부터  라고    하시며  120세 까지 옛조사 스님말씀하시는  감동적이며  뭔가  미묘한  희망과 통함을  느꼈  습니다.  마지막 마침에 우리 열심히  공부합시다    .  하시며 부탁합니다!  그말씀에  ?  나    합장하였읍니다.      행복한  불법의 진리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항상행복을 안으시고 편안하신  무진성  보살님  다음뵈올난ㄷ을 기다리겠읍니다.  약사여래불.  원만행  올림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원만행 보살님! 오래만이에요.  반갑습니다.  모처럼 글 올렸더니 글 덕에 이렇게 안부를 나누게 되네요.  그간 건강하시지요?  못뵌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 그래도 그 모습이 눈에 삼삼합니다. //  법문에 감동 받으셨다니 역시 불심이 깊으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우리 큰스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흐믓하다고 하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같은 스님 모시게 된 인연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세요.

청정심님의 댓글

청정심 작성일

아름다운 인생을 사신 오선주보살님 부럽습니다.
아주 오래 후에 저도 자신만만하게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수재로 학문을 원없이 닦으시고,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퇴임하신 후에도 제가 본 보살님은 경이로움의 그 자체였습니다.
전문분야가 아닌 괘불 태화를 훌륭한 대작으로 그려 내기도 하셨지요.
또 끊임없는 노력으로 여러 작품을 남기셨습니다.  이번엔 젊은 사람도 어려워 하는 진언도 범어로 사경을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건강에 특히 유의하셔서 오랫동안 고운 모습으로 뵙기를 밥니다.

오선주님의 댓글

오선주 작성일

세상에! 이렇게 나를 빛내 주시다니요 !!  고맙고 부끄럽습니다.
괘불탱 등 여러 불화를 그리게 된 것은 큰스님께서 저에게 기회를 주신 큰 불은이었습니다.

나는 항상 큰스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시며 시봉하시는 청정심 보살님을 부러워합니다.
천생으로 타고나신듯 몸과 마음이 민첩하시고
스님의 의중을 마치 이심전심 하시는듯 헤아려 행하시니 존경스럽습니다.
 
불국정토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