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사고쳤다." 

오늘은 이래 저래 우울한 날이었다.

새벽 1시 35분 경, 사람 기척도 없이 대문 초인종이 울려서  놀라 나갔는데, 내가 누구세요라고 목청을 높였음에도 그 쪽에서 오히려 이쪽 반응 살피는 듯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다시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 했다.

작년 이맘 때, 어느 기관에 구직求職 의사를 밝혔었다. 오랜 대학 강단 경험으로 큰 힘들이지 않고 즐겁게 보람 느끼면서 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강사 자리지만 급료도 은퇴자에게는 고마운 수준이었다. 거의 잊고 지나고 있었는데, 17일까지 이력서 갖고  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전화 받을 때만 해도 매우 기뻐했었는데, 며칠 지나는 사이, 내 마음이 바뀌었다.  가볍긴 했어도 교통사고 때문에 벌써 여섯달 째 칩거하다보니 나들이 할 용기가 없어진 나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체력에 자신이 없어지고 보니 그 직장에 가기 위해 전철 타고 합정동에서 다시 전철 갈아 타야 하는 것이 끔찍하게 여겨졌다.  건강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이 실감 난다. 내가 안나가면 젊은이 누군가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착한 명분을 세우고 손에 쥐여 주는 꽃다발을 사양하였다. 짐을 내려놓은 셈인데도 홀가분하지 않고 어쩐지 쓸쓸하다.  

아들의 점심시간이다. 그가 전화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전화 걸었다. 아들의 첫마디가 "어머니 음성이 왜 그렇세요" 였다. 잠 못 잔 탓인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아니하고, 엉뚱한 작난끼가 동해서 "너희 엄마 사고쳤다."라고 운을 뗐다. 그 쪽이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한 밤 중에 도둑이 나를 노리고, 나는 일자리를 팽게쳐버렸다."  이런 무섭게 섬뜩하고, 또 일손을 접어버린 아쉬움을 길게 늘여 놓는 나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나서, 아들은 "이제 무슨 일을 하실려고요. 무조건 잘 하신 겁니다"라고 위로하면서, " '사고 쳤다'는 말이 나를 얼마나 놀라게 하였는지 짐작이나 하세요"라고 원망하였다.  

이어서,  그는 두번 다시 놀라게 하지 말아 달라는 뜻을 전한다.

"그런데, 어머니!  시아버지의 시체놀이 이야기 들어보셨어요"라며, 다음같은 이야기를 했다. 80대 시아버지가 며느리 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소파에 거꾸로 넘어져서 죽은 척하고 있었다. 죽어 있는 시아버지를 발견하고 며느리는 기겁을 하더니 급기야 까무라쳐 버렸다.  이에 역으로 놀란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둘러 업고 병원에 갔다.  며느리가 깨어나자 "내가 좀 심심해서 시체 놀이 해 봤지!"라며 시아버지가 유쾌하게 웃었단다. 이 시아버지는 매우 흡족해 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 혼절할 만큼 마음 써 주는 며느리를 고마워했다는 것이다.

세상살이 3대 거짓말 중 하나가 노인네가 빨리 죽고 싶다고 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이 관심 갖어 주기를 기대해서 하는 말이라 한다.  "엄마 사고 쳤다"라고 역설적으로 한 말 속에 어쩌면 아들이 엄마의 상황에 대해서 "놀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심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체력이 쇠잔함과 더불어 내 이성도 어느듯 기울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한심한 생각에 더욱 울적해 진다.

                                                  2012. 0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