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비밀을 지킨다는 것.

비밀이란 무엇일까?

사전에는, <숨기어 남에게 공개하지 않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법적 의미를 약간 가미하면, <어떤 사실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숨김으로서 일정한

이익이 보장되는 것> 정도로 풀이 해 볼 수 있다.

세상 민심으로 보면 이솦의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란 우화에 잘 나타나고 있듯이

사람들은 남의 비밀을 알고는 속에 담아두지 못하고 발설하고야 마는 속성을 지녔으니 "비밀"처럼 많은 사람들의 행 불행에 직접 관여하는 속 뜻을 지닌 말도 드물 것 같다. 현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터져버린 "비밀" 때문에 낭패 당하고 있는 것을 본다.

고교 입학으로 집을 떠나면서 내게는 밥 먹을 때 신문 읽는 습성이 생겼었다.

몇 해 전부터 돋보기 쓰는 것이 불편해져서 신문 대신 TV를 시청하게 되었다.

요즘, 내 저녁 식사 시간 대에는 주로 드라마가 방영되는데, KBS와 SBS 두 방송국에서 출생의 비밀을 두고 얽히고 설킨 이야기 속에 온갖 비극이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낱 픽션일 뿐이다는 생각에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무료한  혼자밥상의 친구 정도로 생각했었다.

어저께는 갑자기 옛 이야기가 떠 올랐다. 30대 후반부터 몇 해 동안 어느 자원봉사

단체에서 운영하는 법률상담소에서 상담위원으로 봉사하면서 알게 된 사건이다.

법학을 공부했다는 이유와 법원 근무 경력으로 인하여 그 일을 하도록 위임 받았는데, 그 때는 그 일이 진정으로 사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사명감마저 지니고 있었고,

직무상 지득(知得)한 "비밀"은 누설하지 않는다는 윤리의식도 강하였다.

1975년 초가을 어느 날 오후, 40대 중반의 아름다운 여성 한 분이 찾아왔다.

그녀는 M여고 국어교사 H라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법률적

문제를 넘어 인생 상담이었다. H는 좋은 사람을 만나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슬하에 딸 셋을 두고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3년 전에 M여고에 음악 선생 K가 부임해 왔다. 26세의 풋풋한 꽃미남에다가 음악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귀공자였다.

첫눈에 호감이 갔는데, 운명처럼 K의 책상이 자기 옆에 배치되었다. 교사 생활이

서툰 그에게 이것 저것 도움을 주다 보니 차도 함께 마시게 되고 낭만적인 무드가

있는 레스트랑에서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H는 나의 모성 본능일 것이라고 자기 감정을 얼버무렸으나 어느덧 K와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아들의 열애를 눈치 챈 K의 부모가 서둘러 며느리감을 고르고 약혼을 재촉하자

K는 H에게 어차피 맺을 수 없는 인연이라면 우리 사이를 정리하고 좋은 친구로

남자고 애원하였다.  H는 아프지만 그의 뜻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H는 K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H는 천주교 신자로서 교리에 따라 유산을 큰 죄악으로 여겼었고, K와의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결심하였다.

몸이 불어 나는데 따라 고민도 커져갔는데, 선량하기만 한 남편은 늦둥이가 생겼다고 매우 기뻐하였다. 셋째 낳은지 7년만에 얻은 딸이라고 남편은 첫돐잔치를

아주 크게 차리라 하였다. 출판사 사장인 남편은 자기 회사 직원들과 아내 학교 동료들을 함께 집으로 초대하였다. K도 교사들과 함께 왔는데 돐옷을 차려 입은 아이 J를 이쁘다며 안고 있는 그 부녀(父女)의 모습이 너무도 닮아 있어서 기절할 뻔 하였다.

H는 정신 나간듯 간신히 그 날을 넘겼다. J의 두돌이 다가오도록 눈물에 잠겨 곰곰히

생각하여도 어찌하여야 옳을지 알 길이 없어 상담하러 온 것이었다.

지금은 관련 법률들이 개정 삭제 신설 과정 등을 거치며 그 당시와는 많이 달라져

있다. 사회적 개인적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음은 물론이다. 그 때 법률과 가치관 

기준으로 사건 해결책을 모색하였으나 묘책이 떠 오르지 않았다.

사실을 밝히면 상처 입을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만이 부인할 수 없는 진실로

부각되었다. 법적으로도 현재와 같은 재산분활청구권도 없는, 모든 것이 H에게

불리한 현실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대강 다음 같은 이야기가 정리되었다.

* J를 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애지중지 기르는 남편에게 줄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

* 남편은 아내의 배신에 치를 떨 것이다.

* J를 같은 아빠의 딸이라고 믿고 있는 세 언니들은 큰 정신적 혼란에 빠질 것이다.

* 그들의 가정 평화도 깨질 것이다.

* K가 자기 딸 J를 찾아 가겠다(친권)고 나설 수 있다.

* K의 결혼생활도 파탄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 H와 K는 신성한 교육자로서의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 부정행위가 끝 난 날로부터 일정 기간(공소시효)이 지났으므로 간통죄를 비껴

  간다 해도 H의 남편에게는 법정 이혼 사유 중 "혼인을 계속할 수 없는 중대한

  사유"에는 해당할 수 있을 것임으로 경우에 따라 이혼도 각오해야 한다.

* 여자에게 이혼이란 안팎으로 재기부능의 치명적 상처를 안겨 준다.

* 이혼에 관한 유책(有責)사유자에게는 위자료 청구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등 등.

이상이 둘이서 3시간 넘게 대화하며 얻어 낸 그림이었다. H는 혼자 비밀을 지키며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J를 비롯한 모든이에게 평화와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결론 짓고 돌아 갔다. 나는 H에게 남편에게 죄를 비는

마음으로 근신하며 모두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바치라는 교훈 같은 것도 하고

다짐을 받으며 격려도 했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흘러간 지금 나는 깊은 회한에 빠지게 되었다.

H는 비밀을 지금까지 잘 지킬 수 있었을까? 어느 사연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 비록 그들 사이에 평화가 지속되고 있다

하여도 J에게는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그 당시 어려움이 있어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조언해 주지 못한 죄책감이 커져만 간다. 눈 앞에 있는 아버지를

모르도록, 천륜을 저버리도록 방조했던 이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용서를 빌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같은 고통이 엄습해 왔다.

한편으로는, TV연속극들이 일부의 막장 드라마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일정 시청율을 유지하는 까닭은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있는 내용들이어서 공감하는 이 들이 있고,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자기 입장을 거기에 투영하고 되새기며 위안

받는 사람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 사이에 아름다운 행복을 간직한 비밀이라면 비단보자기에 싸서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두면 더욱 귀하고 삶의 등불로 남게도 된다.

그러나 피해자가 있는 경우는 전혀 다르다. 제3자의 인생과 관련하여 당사자 몰래

비밀을 만들고 유지한다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깨닫는다.

철없는 젊은 날의 죄를 뉘우치며 J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H가 지혜롭게 평화롭게 이 비밀을 풀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 할 것이다.

부처님의 무한 자비를 기구한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2012. 03. 17.            무진성 합장